“위대한 지도자이자 위대한 영국인을 잃었다.” 마거렛 대처 전 영국 총리가 서거했을 때 캐머런 총리가 그녀를 추모하며 기린 말이다. 마거릿 대처는 영국 최초의 여성 총리로 11년 6개월간 재임하면서 영국의 모든 것을 바꿔놓았다. 그 핵심에는 ‘가치혁명’이 있었다. 나눠먹기식 사회주의 가치관을 타파하고 각개인이 스스로를 주도하는 자본주의 가치관을 회복시켰다. 국가와 사회의 이념이 바뀌고 제도가 혁파됐을 뿐 아니라 영국민 개인의 삶의 기준과 방식에도 혁명적 변화가 일어났다. 정부와 노조의 바위틈에서 ‘중산층’의 꽃이 피기 시작했다. 기업이 힘을 얻고 국가는 강해졌다.
새벽 2시에 잠자리에 들고 아침 6시가 되면 기상했다. 휴가도 없고 친구도 없었다. 말은 직설적이고 적을 공격할 때는 거침없이 내뱉는다. 맺고 끊음이 분명하고, 실수를 용납하지 않으며 관용이라는 말은 그녀의 사전엔 없었다. 1981년 그녀의 새로운 정책에 저항해 폭동이 일어났을 때 마음 약한 온건파 각료들이 타협할 것을 건의했다. 언론도 사회주의 가치로의 유(U)턴을 예측했다. 하지만 그녀는 단호했다. 돌아갈 사람은 돌아가세요. 여자는 돌아가지 않습니다.”
대처는 그저 남성들이 짜놓은 정치판에서 치어걸에 머무르려고 하지 않았다. 대처는 ‘가정주부식 경제이론’을 주장하며 “정부는 가정주부가 돈이 모자랄 때 하는 방식을 배워야 한다. 정부도 가정주부처럼 가계부를 들여다보고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찾아내야 한다”고 비판하여 정부가 부채를 줄이기 위해서는 가정주부(여성)의 지혜를 본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당시만해도 정치에서 차별받고 소외당하던 여성들은, 할 말 다 하고 똑 부러진 대처의 등장에 환호했다.
당시 영국은 큰 위기에 빠져 있었다. 최강대국의 지위를 미국에 빼앗긴 데 이어, 유럽과 일본에게도 밀려 제조업과 산업이 침체에 빠져 경제가 흔들리고 있었다. 인플레와 노동생산성 저하로 사회 분위기는 활력을 잃어갔다. 1970년대 영국을 강타한 경제 침체와 사회 전반의 무기력한 분위기를 가리켜 ‘영국병’이라는 용어까지 생겨났다.
당시 영국 정부는 심각한 재정난으로 대처가 장관으로 재직하던 교육부의 예산을 대폭 삭감했다. 대처는 예산 절감을 위하여 어린 아동들에게 지급하던 2차대전 시절부터 이어온 우유 무상급식 제도를 폐지하기로 결정했다. 대처는 무상급식 폐지로 절감한 비용을 교육 시설물 증대와 교원 충원에 활용한다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그동안 ‘모성애 강한 어머니’의 이미지를 정치적 자산으로 삼아왔던 대처의 결정에 많은 이들은 엄청난 실망과 배신감을 느끼고 맹비난을 퍼부었다. 이 사건으로 그녀에게는 ‘우유 강도’라는 불명예스러운 별명이 따라붙었다.
대처는 총리 취임 이후 영국병을 치유하기 위한 대대적인 개혁에 나선다. 대처가 무엇보다 주목한 것은 파업과의 전쟁이었다. 당시 영국은 노조의 빈번한 대규모 파업이 만성적인 사회문제로 자리잡고 있었다. 1978-79년 영국에 역대급 한파가 찾아온 가운데 중동발 오일쇼크와 물가 상승의 위기 속에 또다시 노조들이 임금 인상을 요구하며 대규모 파업을 벌였다. 파업으로 공장과 발전소는 물론이고 난방을 못하게 된 학교나 병원 등 공공기관까지 일제히 문을 닫았다. 2~3주에 걸쳐 지속된 파업으로 영국 전역은 마비되고 사실상 무정부 상태에 이르게 된다. 특히 파업의 여파가 가장 컸던 분야는 탄광 산업이었다.
대처는 물러서지 않았다. 강력한 구조조정을 선포하며 생산성이 떨어지는 탄광을 과감하게 폐쇄하기로 결정했다. 대량 실직의 위기에 놓인 노조는 격렬하게 반발했고 전국적인 대규모 시위로까지 확신됐다. 대처 정부는 탄광 노조의 파업에 강경하게 대처했다. 이미 치밀하게 대책을 준비한 대처는 파업기간 동안 대체할 비노조원 운수노동자와 석탄을 확보했고, 유사시 해외로부터 석탄 수입계획까지 세웠다.
또한 대처는 파업을 주도한 시위대에 경찰 기마대까지 투입하여 강경진압했다. 이를 비판하는 여론에 대하여 대처는 “다음에는 그런 일이 있으면 기마대가 아니라 탱크를 보낼 것”이라고 일축하며 강철같은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대처는 “법의 지배를 폭도에 대한 지배로 대체하려는 시도는 성공할 수 없다.” “탄광노조는 영국의 성장을 방해하고 있다”는 적극적인 언론플레이로 파업에 대한 국민적 반감을 부추기면서 탄광노조를 압박했다. 대처 정부의 강경 대응으로 시위대 중 1만 명 이상이 체포되고 8000 명가량이 유죄 선고를 받았다. 1년여간 이어진 파업 사태는 사실상 대처의 승리로 끝났고, 대처 정부는 최초로 탄광노조를 제압하는데 성공한 정부가 됐다. 당시 지지율 급락으로 위기에 처했던 대처는 1982년 아르헨티나와의 포클랜드 전쟁’을 통해 다시 한번 반전에 성공했다.
영국 역사에서 엘리자베스 1세 이후 가장 강력한 권력을 행사한 여성이라는 평가를 받은 대처에게는 두 가지 별칭이 있다. 하나는 ‘철의 여인’, 또 하나는 ‘악랄한 마녀’이다. 이 열정과 냉정의 상반된 평가 사이에 대처 리더십이 존재한다. 그럼에도 대처의 지지자이든, 반대파이든 영국 국민들이 공통적으로 인정하는 부분이 있다. 그것은 바로 대처의 순수한 열정과 자기희생, 솔선수범의 리더십이다.
그녀는 행동하는 리더였다.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1센티미터만 전진하려 해도 싸워야 했다. 총리는 외로운 직업이며 어떤 점에서 그래야만 한다. 군중 속에서 나라를 이끌 수는 없다.” 영국 국민은 대처에게 세 차례의 총리 연임을 허락했다. 대처는 이 지지를 기반으로 영국호의 진로를 바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