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책으로 인생배우기 26.
용기, 의리, 희생, 듣기 좋은 이 말들과 가장 어울리는 것은 ‘영웅’이다. ‘영’은 똑똑한 사람을 뜻하고, ‘웅’은 사내다운 사람을 뜻한다. 한국을 대표하는 영웅이라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인물이 ‘이순신 장군’이다. 영웅이 되기는 쉽지 않다. 왜냐면 똑똑한 사람은 사내답기 어렵고, 사내다운 사람은 똑똑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건 마치 나라에 충성하자니 싸우러 나가야 하고, 그러면 자식을 걱정하는 부모께는 불효해야 하는 충돌 같은 것이다.
〈미스 럼피우스〉에 대해 말하려다 느닷없이 영웅이라는 말에 꽂혀 주절주절 한 이유는 이 책이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사람’에 대한 그림책이기 때문이다. 유명한 그림책 작가로 칼데콧상을 2번이나 받은 바버러 쿠니의 그림책 〈Miss Rumphius〉는 ‘루핀 레이디’로 알려진 실존 인물 힐다 햄린에게서 영감을 받아 만들었다고 한다. 힐다 햄린은 그녀의 모국인 영국에서 루핀꽃 씨앗을 가져와 메인 주 해안가에 씨앗을 퍼뜨렸다는데, 아직도 메인 주에 가면 루핀꽃이 많은지는 모르겠다. 루핀꽃은 한국에서는 층층이부채꽃으로 불리며 꽃말은 탐욕, 모성애, 행복이라는데, 이 말들과 가장 어울리는 어떤 것도 찾아보면 재밌겠다.
어릴 때 이름은 앨리스였던 럼피우스 부인의 일생을 어린 조카가 들려준다. 앨리스의 할아버지는 이민 1세대로 목공예 일을 하셨고, 저녁이면 어린 앨리스를 무릎에 앉히고 세상 이야기를 들려주신다. “나도 어른이 되면 아주 먼 곳에 가 볼 거예요. 할머니가 되면 바닷가에 와서 살 거고요”라고 말하는 앨리스에게 할아버지는 “얘야, 네가 해야 할 일이 한 가지 더 있구나. 그건 세상을 좀 더 아름답게 만드는 일이지”라고 하신다.
금방금방 어른이 된 앨리스는 미스 럼피우스로 불리며, 바다와 멀리 떨어진 도시 도서관에서 일하기도 하고, 열대 섬에서 원숭이와 앵무새를 키우기도 했으며, 만년설이 덮인 산봉우리에 오르고, 정글을 뚫고 지나고, 사막을 횡단하며 결코 잊을 수 없는 친구들을 사귀었다. 그러다 허리가 몹시 아파서 이제 바닷가에 살 집을 구해야 할 때임을 깨닫고 베란다에 서서 해가 뜨고 지는 것을 볼 수 있는 집을 구한다. 조그만 정원을 꾸미고 꽃씨를 뿌리며 행복해하던 럼피우스는 세상을 아름답게 할 일에 대해 생각한다. “세상은 벌써 아주 멋진걸.” 하면서.
오래 아프고 일어난 어느 봄에, 럼피우스는 언덕 꼭대기에서 푸른빛, 보랏빛, 장밋빛 루핀 꽃들이 가득한 것을 본다. 집 앞 조그만 정원에 뿌렸던 꽃씨가 바람에 실려 먼 곳까지 흩어져 언덕 위까지 꽃밭이 된 것이다. 그때부터 럼피우스는 꽃씨를 사서 주머니에 가득 넣고 들판과 언덕을 돌아다니며 꽃씨를 뿌린다. 사람들은 “저 정신 나간 늙은이”라고 했지만, 럼피우스는 개의치 않고 고속도로와 시골길까지 온통 환한 꽃밭을 만든다. 이제 파파 할머니가 된 럼피우스를 사람들은 루핀 부인이라고 부른다. 루핀 할머니는 아이들에게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세상을 아름답게 하는 사람이 돼라!’ 어쩌면 아이가 부담스러워할 수도 있는 말이다. 집에서 학교에서 사회에서 영웅이 되어야 한다는 얄궂은 강박관념을 익히며 살아온 내 세대가 이 말을 한다면, 그것은 작은 정원을 가꾸는 것처럼 간단한 일로 대답할 수 있는 말이 아니다. 그래서 나는 어린 앨리스가 할아버지의 바람에 억눌리지 않고 당당하게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보기 좋았다. 미스 럼피우스가 루핀 부인이 되지 않았다 해도 낯선 곳을 여행하고, 결코 잊을 수 없는 친구들을 사귀고, 자신만의 경험을 아이들에게 들려주는 것만으로도 이 사람의 인생은 참 아름답다.
실제 루핀 레이디였던 힐다 햄린도 60세가 넘은 나이에 루핀꽃씨를 뿌렸다고 한다. 여성의 활동이 제한적이던 1900년대 초에 태어나 살았던 힐다 햄린이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나이가 들어도 마음에 단단한 씨앗을 품고 있어서 일거다. 언젠가는 아름답게 꽃피우리라는 씨앗. 누군가의 마음에 이런 아름다운 씨앗을 심어줄 수 있다면 그 사람이 정말 세상을 아름답게 하는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