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 한바퀴… 눈에 익숙한 아침 산책길에 안 보이던 표지가 보였다. 무빙세일 이라는 커다란 검정글씨가 바람에 날리며 아쉬운 듯 흔들리고 있었다. 눈부신 아침 햇살아래 그것들은 이방인처럼 혼자 동떨어져 나부끼며 어울리지 않는 묘한 풍경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그 낯선 흔들림이 마치 누군가의 관심이 절실하다는 몸부림처럼 느껴져 나는 발길을 돌려 그곳으로 향했다.
손때 묻은 작은 의자와 유리 그릇들이 종이가 날리지 않도록 누르고 있었다. 하지만 힘에 부쳤는지 어느새 유리 그릇들은 빗겨 나가고 종이 위의 글자들은 위 아래로 출렁이며 들썩이고 있었다. 다른 한쪽에는 잡다한 물건들이 나름 질서를 가지고 놓여 있었다. 하지만 무엇을 위한 안간힘 인지 알수없는 애처러움이 느껴졌다. 한때는 힘이 좋았을 쥬서기, 앙증맞은 모습으로 사랑 받았을 작은 찻잔, 세월이 묻어 있는 나무 테이블, 화사함을 뒤로하고 곱게 접혀진 옷가지들… 제각각 눈부시게 빛났던 그때를 회상하듯 자신의 효용을 뽐내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들은 밝은 햇살아래 더욱 더 초라해 보였다.
여기가 아닌 다른 곳으로 가기 위해 현재 가지고 있는 물건들 중 일부를 다른 사람에게 넘기는 행위를 우리는 무빙세일이라고 한다. 필요는 하지만 뭔가 조건이 맞지 않아서 할수없이 처리해야 하는 물건들 또는 더 이상 필요가 없는 물건들이 그 대상이 된다. 한때는 소중했었지만 지금은 아닌 추억들, 새롭게 시작하는 시간에 너의 자리는 없다는 결정으로 이끌려 나온 지나간 영광의 순간들, 아쉽고 안타까워 발길이 안 떨어진다 해도 결국은 버려지는 과거 속 귀중했던 시간들… 사람이라면 배신감을 느끼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곧 무슨 망상일까 하며 얼른 발길을 돌렸다.
집에 돌아와 아침 청소를 시작했다. 하지만 왠지 움직이는 손끝은 허공을 부여잡고 있는 것같은 불안으로 어수선했다. 눈 앞에선 흰 종이위에 덩그러니 놓여져 마치 버림 받은 것처럼 보이던 물건들이 아른거렸다. 나도 열심히 살았다. 사회 구성원으로 주어진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고 지금 여기에 당당히 서 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시대는 날로 새로워지더니 어느새 AI 의 세상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런 변화에 발빠르게 변화하기가 힘겨운 나는 부인할 수 없는 소외감을 느끼고 있다. 이제 더는 새로운 세상으로 같이 가지 못할거라고 전기차가 비아냥되고 Open AI 가 킬킬거리고 있다.
새로운 시간이 아닌 과거의 시간 속에 갇혀 박제처럼 먼지를 벗삼아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점점 두려워졌다.
답답한 마음에 하던 일을 멈추고 다시 그곳으로 갔다. 그리 추운 날씨도 아니건만 옷깃을 여미며 길을 재촉했다. 그곳은 아침과는 달리 제법 활기가 느껴졌다. 동네 사람들이 한 둘씩 모여 담소를 나누는 훈훈함 마저 감돌았다. 한 쪽에선 주인으로 보이는 사람이 아쉬운 듯 오래 돼 보이는 화병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얼핏 보기에도 고급 크리스탈은 아니었지만 투명한 유리병 입구는 자주빛같은 테두리로 둘러쳐져 있었고 몸 전체에도 고운 문양을 가진 옛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왠지 익숙한 그 화병은 어릴 때 반닫이 위에 놓여 있던 엄마의 꽃병을 닮아 있었다. 아쉬워 하는 주인의 시선을 뒤로하고 화병을 안고 집으로 향했다. 깨끗이 씻은 화병을 예쁜 러그를 깔고 다이닝 테이블위에 올렸다.
휴대폰 문자 소리가 들렸다. 한국에서 온 문자였다. 하루가 빠른 시간대에서 날라 온 부활 축하 메시지가 분홍빛으로 휴대폰 전면에 떠올랐다. Happy Easter 속 달걀들은 다양한 색들로 고운 옷을 차려 입고 얼굴마다에는 재미있는 표정을 한 남녀노소가 다같이 활짝 웃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들은 모두 한 바구니에서 행복해 보였다. 우리 모두가 하나의 공동체로 서로의 역할은 다르지만 각자의 자리에서 행복하다는 것을 잊지 말라고 예수님이 말씀하고 계신것 같았다. 소외되고 있다는 생각이 스스로 규정지은 어리석은 감옥이라는 것을 어서 빨리 깨닫고 다시 태어나라는 부활의 메세지가 뜨겁게 가슴에서 소용돌이쳤다.
마당으로 나가니 부드러운 바람이 인사하듯 온몸을 감싸 안았다. 내일은 화병과 어울리는 꽃을 꽂아야 겠다는 생각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