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 50년이 넘게 살아왔어도 중간 도시에만 살다가 가끔 뉴욕 구경을 가면 옛날 코미디언 서 영춘의 ‘시골 영감 서울 구경’이 생각난다. “시골 영감 처음 타는 기차 놀이라/차표파는 아가씨와 승강을 하네/이세상에 에누리 없는 장사가 어딨어/깎아달라 졸라대며 원 이런 질색/기차는 삐 하고 떠나갑니다…저 기차 좀 붙들어 줘 돈다 낼 테니.”
여름 방학을 맞아 뉴저지 아들네 집에 갔을 때 뉴욕 구경을 갔다. 뉴저지에서 기차를 타고 펜 스테이션에 내렸다. 팬 스테이션에 내리니, 수많은 사람들이 바쁘게 오고 가는 모습이, 불개미집을 건드려 수많은 개미들이 재빠르게 흩어지는 모습 같다.
한국, 일본, 중국인 같은 몽골 계의 인종들, 인도 중동의 거무잡잡한 사람들, 백색의 앵글로색슨의 후예들, 까만 피부의 아프리카 족들, 목이 짧게 보이는 사람들, 자세히 보면 각각 다른 사람들이 전체로 보면 생동감 넘치는 한 마리의 동물의 부분처럼 보인다.
얼굴모양과 색깔도 다르지만, 키도 작고 큰 사람들, 머리 모양도 검은 머리, 노랑 머리, 꼬불꼬불한 머리, 다발 머리, 가발 머리, 대머리, 검은 색 혹은 흰색의 터번을 쓴 머리, 여러 모양의 모자를 쓴 머리, 체구도 수퍼 홀쭉이에서 수모 뚱보에 이르기까지 너무 다양하다. 자세히 보면 다르지만, 그들은 모두 살아있는 공룡의 지체 같아 보인다.
펜 스테이션에서 타임스 스퀘어로 가본다.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관광지들 중 하나로, 매일 36만명에 달하는 관광객들이 모인다는 타임스 스퀘어를 어슬렁거리며 길거리에서 하는 마술쇼도 지나가고 사람들의 물결에 섞여 보면 나 라는 존재의 의미가 새롭게 느껴진다. 한사람 한사람은 없어지고 전체가 보이고, 내가 없어지고, 내가 전체속의 한 부분으로 느껴진다. 편안하다.
인종의 용광로 또는 멜팅 팟(melting pot)이라고 미국을 부르는 이유가 펜 스테이션이나 타임스퀘어를 걸으며 둘러보면 참 어울리는 말이라고 느낀다. 다양한 배경과 인종들이 모여 제각기 다른 기능을 발휘하여 톱니바퀴를 돌려 세계에서 가장 강한 나라를 만들며 바쁘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물결 속에 섞이니, 나도 마음이 편하고 통쾌하다.
돋보이는 전체 속에 개인의 풍요와 부족도, 자랑스러움이나 부러움도 사라진다. 잘생긴 사람을 선망할 필요도, 아름다운 사람이나 그렇지 않은 사람도 거기가 거기 고, 좋은 옷 같은 것은 아예 마음의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있는 그대로의 나, 가진 그대로의 나, 할 수 있는 능력 그대로의 나, 생긴 그대로의 나, 그대로의 내가 그 군중의 다양성 속에 섞이니 큰 속에 작은 부분이 되어 아주 편하게 느껴진다.
시티 투어 버스를 탔다. 버스 지붕에 마련된 좌석에 앉아 투어 가이드의 설명을 들으며 뉴욕 시 중심가를 돈다. 아파트 하나에 백만 달러가 넘고, 그런 아파트가 수도 없이 쌓여 하늘로 치솟은 빌딩들, 그런 빌딩 하나 가격은 얼마나 될까? 천문학적인 금액이 될 것이다. 땅값보다 공중 가격이 뉴욕에서는 무지하게 비싸다고 한다.
전에 뉴욕 왔을 때는 하루 종일 미술관과 박물관, 센트럴 파크에서 보낸 적도 있다.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에 올라가 세상을 내려다본 적도 있다. 배를 타고 자유 여신상에 가 본적도 있다.
한번은 뉴욕의 빈민가 할렘을 친구차로 지나치며 그의 설명을 들었다. 낮에도 총기 사건이 발생하고 마약과 폭력, 각종 범죄의 소굴로 인식되어 잘못하면 살아서 빠져나오기 어렵다는 빈민가, 그 친구의 설명으로는 빈민가가 점점 더 확장되어 간다고 했다. 자본주의 시장 경제의 무한 경쟁 속에 낙오자들이 모이는 곳이 점점 확장되어 간다고 그늘진 표정을 지었다.
뉴욕의 두더지 사람들에 대한 기사도 읽었다. 쓰지 않고 버려진 지하철 동굴들, 크고 작은 동굴들 속에 노숙자들이 모여 산다고 한다. 소유보다는 점유를, 노동 보다는 구걸을, 생산보다는 폐품을 이용하는 지하 공동체 기사도 읽었다.
금융, 상업, 예술, 패션, 엔터테인먼트, 국제 외교의 세계적인 중심인 뉴욕을 내가 경험하는 것은 장님이 전체를 못 보고 손으로 더듬어서 코끼리를 알아 가는 것 같은 부분적인 경험이다.
문명은 전문화 분업화를 부르고, 분업화된 현대의 전문가들은 한 우물을 파야 한다. 전문가들은 우물 안 개구리가 되는 경향이 있다. 나도 그렇다. 어떻게 보면 현대를 사는 우린 모두 코끼리를 손으로 더듬어야 하는 장님 꼴이 되어가는 것은 아닐까? 나의 뉴욕 구경은 시골 영감 서울 구경 같은 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