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국부 쑨원((孫文)), 중화민국의 총통 장제스(蔣介石), 공자의 후손이자 중국의 대부호 쿵샹시(孔祥熙)는 모두 중국 근현대사에서 자신의 이름을 굵직하게 남긴 거물들이다. 그런데 이들에게는 또 한 가지 흥미로운 공통점이 있다. 바로 이 세 사람의 아내가 모두 친자매’라는 사실이다. 중국은행 총재를 지낸 쿵샹시(孔祥熙)의 아내인 첫째 쑹아이링(宋蔼龄), 쑨원의 배우자인 둘째 쑹칭링(宋庆龄), 장제스와 결혼한 셋째 쑹메이링(宋美齡)은 모두 쑹씨 집안의 핏줄을 타고난 자매였다. 청나라 말기에 돈과 권력, 명예를 모두 가진 쑹씨 집안을 두고 ‘쑹가황조(宋家皇朝)’라고 불렀다. 쑹씨 세 자매는 남편들과 함께 중국 근현대사의 중요한 순간들을 함께 겪으며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세 자매의 아버지 쑹자수는 가난한 농부 집안에서 태어나 어린 나이에 미국에 사는 먼 친척에게 입양됐다. 미국으로 건너간 쑹자수는 미국에서 대학 교육을 받고 중국을 더 나은 나라로 만들어보고 싶다는 꿈을 키웠다. 쑹자수는 1885년 조계를 중심으로 발전하고 있던 상하이로 돌아와 자리를 잡았다. 사업 수완이 좋고 영어를 잘했던 쑹자수는 출판사, 무역 등 사업으로 성공했고 손꼽히는 거부로 성장했다. 그는 자식들에게 서양문물에 눈뜨도록 가르치고 어린 나이에 미국 유학까지 보냈다. 그는 “가장 선진적이고, 과학적인 것이 위대한 교육방식이다. 천성이 곧 개성이다. 개성을 억압하는 것처럼 미련한 짓은 없다”며 암기 위주의 중국식 전통교육을 거부했다. 그는 “지식이 힘이다. 믿을 거라곤 머릿속에 든 지식밖에 없다. 지식을 갖춰야 경험을 활용할 수 있다”는 말을 입에 달고 다녔다.
쑹자수는 모두 6남매를 두었는데, 장녀인 아이링과 동생 메이링은 성격이 꽤 활달했고 둘째인 칭링은 내성적이며 온순했다고 한다. 신식 교육을 받았던 쑹자수는 “여자도 조국을 위해 큰 일을 할 수 있다”며 세 딸을 모두 미국에 유학보냈는데, 1908년 쑹메이링 또한 언니들과 함께 도미했다. 쑹메이링은 16세의 나이로 조지아주의 웨슬리언 칼리지에 들어갔다가 매사추세츠주의 웰즐리 칼리지로 편입하여 1917년에 학사 학위를 취득했다. 쑹메이링은 총명하고 다재다능했다. 대학 시절부터 유창한 영어 실력 외에 6개 언어를 구사할 정도로 어학에 발군이었다. 그 외에 중국화 방면에서도 상당한 식견을 가지고 있었다. 피아노 실력 역시 수준급이었을 정도로 다방면에 뛰어났다.
그녀는 스스로 “내 몸과 정신에서 유일하게 동양적인 것이 있다면 그것은 내 얼굴뿐이다”라고 말할 정도로 언어에서부터 사유방식까지 완전 서구화된 문화를 체득하고 1917년 중국으로 돌아온다. 귀국 후 기독교 활동 등 각종 사회활동을 하던 쑹메이링은 1920년 당시 황포군관학교 교장이던 장제스(蔣介石)를 만나게 된다. 뛰어난 미모와 탁월한 재능과 야심을 가진 쑹메이링과 비록 아이 셋의 유부남이었지만 새로운 중국의 지도자로 등장한 장제스의 만남은 11년의 나이 차이와 주변의 반대를 극복하고 결국 결혼으로 이어진다.
쑹메이링은 결혼 이후 장제스의 비서이자 외교고문으로, 자유분방한 미녀 로비스트로서 자신의 탁월한 재능을 십분 발휘한다. 특히 1936년 장제스가 장쉐량(張學良)에게 감금되는 시안(西安)사변 때는 직접 시안으로 날아가 저우언라이(周恩來)와의 담판을 통해 남편을 구해낸다. 일본의 진주만 공격 이후 1943년 2월에 쑹메이링은 미국을 방문하여 유창한 영어로 의회 연설을 했다. 그녀는 중일전쟁에서 중국의 항일의지를 밝히고, 미국의 지원을 호소했다. 이는 큰 호응을 이끌어 냈는데 중국인으로서는 첫 번째 미국 의회 연설이었다. “선교사가 중국에서 예수를 알렸다면, 쑹메이링은 미국에서 중국을 알렸다”는 격찬을 들었을 정도였다. 1943년에는 카이로 회담에 남편 장제스의 통역으로 같이 참석했다. 그녀는 유창한 언변과 외교력으로 당시 외신에서도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여성, 능수능란한 암호랑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2차대전이 끝난 후 쑹씨 세 자매의 운명은 엇갈렸다. 국공내전이 재개되면서 세 자매의 관계도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녔다. 둘째 칭링은 남편 쑨원의 정치사상을 이어갈 계승자로 마오쩌뚱의 공산당을 선택했다. 첫째 아이링과 막내 메이링은 장제스의 국민당 편에 섰다. 결국 길고 긴 국공내전은 마오쩌뚱의 승리로 끝났다. 1949년 12월 장제스가 200만 명의 군인과 주요 인사들을 데리고 중화민국 정부를 대만 섬으로 옮긴 ‘국부천대’를 단행하면서 아이링과 메이링도 남편들을 따라 대륙을 떠나게 된다. 이후 아이링은 1973년 미국 뉴욕에서, 칭링은 1981년 베이징에서 각각 세상을 떠났다. 세 자매 중 가장 장수한 막내 메이링은 장제스 사후 미국으로 건너가 2003년 106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특히 3세기에 걸쳐 신해혁명과 청나라의 멸망, 국공합작, 항일운동, 국민당과 공산당의 분열, 국공내전, 중국과 대만의 분단, 중국과 대만의 현대화 과정 등을 모두 지켜본 쑹메이링은 그야말로 중국 근현대사의 산 증인이었다. 후대의 세인들은 세 자매에 대해 이렇게 평한다. “첫째 아이링은 돈을 사랑했고, 둘째 칭링은 중국을 사랑했으며, 셋째 메이링은 권력을 사랑했다.”
쑹자수의 앞을 내다보는 혜안이 없었다면 세 자매의 이름을 역사에 올릴 수 있었을까? 자녀교육 전문가인 시치다 마코토 박사는 ‘부모의 습관이 아이의 미래를 결정한다’고 단언한다. 그가 자녀교육에 있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바로 부모의 역할이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비슷한 재능과 학습 잠재력을 가지고 태어난다. 하지만 그냥 구슬이 될지 다이아몬드가 될지 즉, 아이의 재능을 어떻게 발견하고 어디까지 발휘하게 할지는 부모의 역할이 크고 중요하다는 것이다. 사람이 자식을 낳아 사람답게 길러내는 것은 축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