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 좀 들어 볼래? 낡은 카세트 테이프를 들고 무슨 신나는 일이 생긴 사람처럼 웃으며 하신 말씀이었다. 뭐예요? 요즘엔 전혀 사용하지 않는 카세트를 어디서 찾으셨는지 버튼을 꾹 눌러 놓고 들어보라 하신다.
언제 녹음을 해 놓았던 걸까? 엄마 아빠와 함께 노래를 부르며 웃고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엄마가 노래교실을 다녀온 날 이였으리라. 조용필의 허공을 배웠는데 어렵더라 하시며 나보고 한번 해 보라 하는 소리. 그 말에 내가 이 노래 알아 하고는 한 소절 부르면 엄마가 따라 부르고 그렇게 둘이 주거니 받거니 하는 사이로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오늘도 걷는다 마는 정처 없는 내 발길…. 아빠의 애창곡 나그네 설움 인가 하는 노래 소리가 모녀가 부르는 허공 속에 자연스레 뒤섞여 들어 묘하게 화음을 이루고 있었다. 엄마는 노래 부르는 걸 좋아하신다. 무언가를 하다 가도 난데없이 노래 한 소절이 나온다.
설거지를 하다 가도 “찔레꽃 붉게 피는 남쪽나라 내 고향.. ” 대화를 나누다 가도 “내 나이가 어때서 사랑하기 딱 좋은 나인데..” 아주 오래전 그날도 어찌하여 노래를 하게 되었는지 몰라도 엄마가 나에게 진미령의 민들레 라는 노래를 해 보라해서 불러본 모양이다. “나 어릴 땐 엄마 품에 자랐지만 이제는 알아요 떠나는 것을 엄마 품이 아무리 따뜻 하지만 때가 되면 떠나요 할 수 없어요. 안녕 안녕 손을 흔들며 두둥실 두둥실 떠나요. 민들레, 민들레처럼 돌아오지 않아요 민들레처럼.”
가사는 꽤나 슬피 들리는데 엄마는 내 목소리가 좋다며 그 노래를 녹음해 놓았었다. 그렇게 우리가 한때는 함께 웃으며 노래도 부르고 놀았던 때가 있었다는걸 새삼 떠올려 보게 된 날이었다. 어머나 세상에 이걸 아직도 갖고 있었어요? 너무 오래전 일이라 기억조차 없을 줄 알았는데 테이프에서 들려오는 부모님과 나의 목소리는 우리들의 젊은 날을 추억하게 해 주었다.
왜
얼마전 AI 가수가 들려주는 노래를 들었다. 너무나 깜짝 놀란 일이었다. 현직 활동하고 있는 가수와 AI의 노래는 차이를 못 느낄 정도로 닮아 있었다. 어느 사람이 특정 가수의 노래를 흉내내는 모창은 나름 재미가 있고 때로는 찬사를 받기도 한다. 그럼 에도 원곡의 가수가 갖고 있는 맛은 달라서 우린 진짜를 찾아 내고 진짜가 주는 깊은 맛을 기억하며 원곡을 즐긴다.
하지만 이젠 가짜를 구별해 내는 일이 점점 어려워졌다. 과연 우리는 무엇을 위해 이렇게 많은 것들을 복사하여 만들어 놓는 것일까? 앞으로 AI와 함께하는 일들은 점점 많아지고 어느 날 우린 사람보다 AI 와 더 친숙 해져 있을지도 모르겠다. 생각만 해도 나로서는 기대보다 무서운 감정이 먼저 드는 것이 별로 반가운 소식은 아니다.
돌아가신 분을 기억하고 만나는 행복을 갖게 해주려고 만들어 낸 AI 목소리 복사는 이미 실현되어 어느 방송에서 내 보였다. 죽은 사람의 목소리 그대로 살아있는듯 주고받는 대화는 신기하기도 했지만 소름 돋는 장면이었다. 그렇게 모든 사람이 죽어도 죽지 않은 듯 살아 있는 사람들과 관계를 이어 나갈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워 함께 하고 싶다는 이유를 들어 인간의 욕망을 채우고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더 맞을 것이다. 순리대로 살아가는 진짜 사는 이야기가 자리를 잃어가는 기분이다.
테이프 속에서 나직이 노래를 부르시던 아빠는 돌아가셨다. 7년전 한국에 방문했을 때 아빠는 기분이 좋아서 그 낡은 테이프를 들고 나와 더 오래전 우리가 함께 한 추억을 기억하듯 들려주신 것이었다. 지금도 가끔은 꿈속에서 아빠의 목소리를 듣는다. 내가 기억하는 아빠의 진짜 목소리, 살면서 내내 들었던 생생한 그 소리는 너무나 반갑고 기분 좋은 소식이 되어준다.
그렇다고 그리운 사람의 소리를 과학적으로 되살려 계속 듣고 싶은 생각은 없다. 이렇게 아빠가 남겨놓은 추억과 함께 아주 가끔 기억할 수 있으면 그걸로 만족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