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하이오에 살 때 한인 교회에서 목사님과 여선교회 임원들이 한 달에 한번 정도 펜실베이니아 시골마을에 있는 셸터를 방문했다. 정부가 운영하는 그 셸터에는 한국 여인이 있기 때문이었다. 정신 질환이 있으나 약물 치료를 받으며, 자신과 남에게 위험하지 않은 상태의 여인들이 사는 셸터라고 했다.
한인 교회에 새로 오신 젊은 목사님에게 어느 날 전화가 왔다. 전화한 사람은 한국에 근무한 적이 있는 미국 남자였다. 자기의 한국인 아내가 너무 외로워 병이 나서 셸터에 있는데, 방문해 주었으면 좋겠다는 전화였다.
그 여인이 머무는 셸터에 목사님과 여선교회 임원들이 찾아 갔을 때 그 여인은 머리를 단정하게 빗고 손님을 맞는 주부처럼 차분하게 한국 사람들을 만났다. 그녀가 거처하는 방엔 침대가 두 개 있고 그녀가 사용하는 침대 옆에는 이민 가방이 있었다. 반백이 된 긴 머리를 빗어 등으로 흘러내리게 한 모습, 한국 사극에 나오는 귀신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머리가 긴데 머리를 다듬어 드릴까요?” 교회에서 간 한 여인이 말했다. “아니요. 남편이 이 긴 머리를 좋아해요!” “남편은 가끔 와 봐요?” “남편은 다른 여자하고 좋아하다가 살아보니 나보다 못해서 같이 살자고 하지만, 나는 안 살아요.” “집에는 가끔 가세요?” “내 집은 창경궁이에요. 창경궁에 가야지요. 보세요 짐도 다 싸 놨어요”라며 이민 보따리를 가리킨다.
“창경궁이 집이에요?” “예 창경궁이 내 집이에요.” “거기 살았어요?” “예 창경궁에 살았어요. 정릉에 집을 지금 짓고 있어요. 내가 돈을 보내서 궁전 같은 새집을 짓고 있어요.” “돈을 누구에게 보냈는데요?” “내 동생 요.” “창경궁에 가신다면요?” “거기 가서 살 거예요.” “정릉에 집을 짓는다면서요?” “거기도 갈 거예요.”
교회에서 방문한 사람들은 느꼈다. 보기에는 별로 다르게 보이지 않는 여인이 믿을 수 없는 말을 한다는 것을. 그리고 그 여인이 그 셸터에 오게 된 직접적인 계기는 집의 벽 시계를 남편에게 던지고, 식칼로 찌른다고 위협한 사건 때문이라고 한다.
셸터를 다녀와서 밤잠을 못 잤다고 하는 분이 있었다. 자신도 국제결혼 한 부인이었다. 외로워서 밤잠을 못 잤다고 했다. 아이들도 이젠 다 커서 집을 나가고, 남편은 갱년기를 지나는 그녀를 이해하지 못하고, 자신은 교회에 나와 사람들을 만나고 교회일에도 적극 참여하지만, 셸터에서 만난 부인은 누구하고도 말을 나눌 수 없으니 딱하다고 했다. 셸터에 있는 부인은 너무 외로워서 그렇단다. 그건 병이 아니란다.
“셸터에 있는 여자를 우리 교회에 매주 데려오면 좋아질 거예요. 외로워서 그래요!” 교회에서 간 한미 부인은 그렇게 말했다. 이웃에는 말을 나눌 친구도 한 사람 없는 미국사람들만 사는 촌에서, 애들은 커서 집 나간 빈 둥지 증후군에 갱년기를 맞은 한국여인의 외로움, 그 여인의 이야기를 들으니, 전에 내가 참가했던 스트레스 관리 자원 워크샵이 생각났다.
스트레스 관리 워크샵의 내용은 누구나 살아가노라면 스트레스를 받는데, 스트레스를 관리하는 자원이 풍부한 사람은 건강한 삶을 계속 살아가지만, 관리할 자원이 부족한 사람은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스트레스 때문에 병들고 죽는다고 했다.
스트레스 관리 자원이라는 것이 대화를 나누고 서로 도움을 주고받는 인간관계라고 한다. 일터에서 일의 문제를 의논하는 동료의 수, 연장을 빌리거나 차를 같이 타거나 애들을 서로 돌 봐주는 등 친하게 지나는 이웃 가정 수, 배우자의 유무, 친구와 가족들의 내 집 방문 빈도, 개인적인 문제 상담 빈도, 친목 사교 모임, 마을 사건 모임, 운동 그룹에 참가 빈도, 그런 만남을 숫자로 계산하여 숫자가 많은 사람은 스트레스 관리 자원이 풍부하여 건강하지만, 그 숫자가 적으면 자원이 부족해서 병이 든다는 이론이다. (전에 쓴 “스트레스 관리 자원’)
“셸터에 있는 여자를 우리 교회에 매주 데려오면 좋아질 거예요. 외로워서 그래요!” 그 말은 스트레스 관리 자원의 이론과 상통한다. 그분이 교회에 정기적으로 참가해서 사람들을 만나고, 소그룹에 참가하여 여러 일에 얽혀 사람들과 어울리고, 목사님과 만나 상담도 받으며 하나님을 알아 간다면 병이 좋아 질 것 같다.
나도 나이가 많아지니 주위에서 알던 사람들이 하나씩 떠난다. 그래도 아직 옆에 생활을 나눌 이웃이 있다는 사실이 새삼 고맙고 감사하다. 살아 있는 동안 나도 내 이웃에게 도움이 되는 좋은 이웃이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