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친구 만나 올리브 강의 듣고
빗속 걸으며 형언 못할 행복감에 젖고
# 24일째
어제는 출출했다. 레스토랑이 문을 열 때는 아직 멀었고, 일찍 저녁을 먹고 쉬자 해서 옆에 있는 마트에 갔다. 간 소고기를 샀다. 알베르게 식당에서 소금과 파슬리, 후추로 양념을 해서 가스레인지에 구우려 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 가스가 떨어졌는지 작동을 안 한다. 어쩌면 좋으냐? 하고 있는데, “송, 그럴 때는 이렇게 하면 돼.”
토스코다. 익숙하게 접시로 옮기더니 전기 오븐에 넣고 12분에 맞춘다. 윙-돌아가는 소리. 기가 막힌 냄새와 함께 김이 모락모락. 정찬을 먹었다.
카미노 순례길에는 수많은 성당이 있다. 세워진 배경이나 유래가 다 다르고 모양도 제각각이다.
그 토스코와 함께 길을 걸었다. 토스코는 40세의 이탈리아 사람. 가업을 이어받아 농사를 짓고 있는 농부다. 무슨 농사를 하느냐고 물었다. 올리브 농사를 한단다. 올리브 소리에 눈이 번쩍 뜨였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나무이기에.
그가 말한다. “송, 올리브 나무가 어떤 나무인지 알아? 천 년을 사는 나무야. 전성기가 300년 때고.” 계속 설명한다. 식품점에서 파는 엑스트라 버진은 진짜가 아니란다. 진짜 엑스트라 버진은 상온에서 짠 것을 말하는데, 시중의 것은 고온에서 짠다. 맛과 풍미가 다르단다. 이탈리아에서는 집집마다 짜는 기구가 있어 엑스트라 버진을 그 자리에서 짜 먹는단다.
그의 농장에서는 발사믹 식초도 만드는데, 오크통에 보관한다. 일 년에 한 번씩 오크통을 바꾼다. 이렇게 15년, 30년을 보관하면 식초에 오크 향이 밴다. 맛과 향! 이것이 발사믹 식초의 정수란다.
그와 걷는 동안, 그림 같은 집을 보았다. 언덕 위의 하얀 집. 먼동을 배경으로 측백나무 사이의 그림 같은 집. 한참을 서서 보았다. 우리 집이 생각났다. 우리 집도 언덕 위의 하얀 집이다.
은퇴를 앞두고 땅이 넓은 오래된 집을 샀다. 조금씩 조금씩 고치고, 조금씩 조금씩 가꾸었다. 이제는 제법 괜찮은 보금자리가 되었다. 비도 새지 않고 딱따구리가 쪼아댄 구멍도 메워졌다. 뒷마당에는 과일나무가 있고 앞마당에는 꽃나무가 있다. 장미, 수국 사이에 메리골드를 잔뜩 뿌렸더니 얼마나 풍성한지! 동네 사람들이 아이들과 함께 와서 사진을 찍는다.
오늘은 그리워하는 날인지 갑자기 그리움이 몰려온다. 여태까지 걸었던 길이 그립고, 두고 온 집이 그립고, 두고 온 손자들이 그립다. 손자들은 이 할아버지를 생각할까? 손자들이 보고 싶다.
먼동이 틀 때쯤 만난 언덕 위의 하얀 집. 은퇴 후 장만한 우리 집 생각이 났다.
# 25일째
오늘은 비가 내렸다. 온종일. 빗속을 걸었다. 하루 종일. 이렇게 긴 시간을 비 맞으며 걸은 것은 처음인 것 같다. 참으로 행복했다. 가끔 들리는 워낭 소리, 판초 우의 위에 떨어지는 빗소리. 그 외에는 아무 소리가 없다. 오로지 적막. 그런 적막 속을 홀로 걸었다. 행복하도록 걸었다.
이 길을 야고보의 길이라 한다. 야고보를 스페인어로 하면 디아고, 디아고 앞에 세인트 (saint: 성)를 붙여 샌디아고가 되었고, 이것의 된발음이 산티아고다. 야고보는 당시 땅끝이라고 하는 스페인에서 선교했고, 예루살렘에서 순교했다. 야고보의 추종자들이 그의 유해를 배에 싣고, 그가 선교했던 스페인 땅에 묻었다. 때는 기독교가 박해를 받던 시절. 모두가 이 일을 쉬쉬했고, 야고보의 무덤은 구전으로만 내려왔다.
걷다가 만난 이색 조형물
수많은 세월이 흘렀다. 어느 날, 수도사 하나가 길을 걷고 있었다. 갑자기 하늘에서 큰 별이 나타나 한 곳을 비추었다. 급히 가보니 전설처럼 들려왔던 야고보의 무덤! 그 위에 성당을 세우고 이름을 콤포스텔라라고 했다. 콤포(들판) 스텔라(별). 사실인지 아닌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리라. 그것이 가지고 있는 의미가 중요한 것.
많은 순례자들은 말한다. 이 길은 가성비가 매우 높다고. 보통 여행을 하게 되면, 항공료를 포함해서 하루 350달러에서 550달러를 잡는다. 그러나 카미노는 하루에 100달러 정도가 든다. 그러니 가성비가 높지 않은가? 라고 말하는데, 그것 이상이다.
이 길은 그 어떤 것과 비교할 수 없는 것이 있다. 이 길을 걷는 중에 마주치는 이들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이들의 삶. 이런 것들이 내 속으로 들어와 머릿속에만 있던 지식을 가슴으로 내려보내고, 그래서 만들어지는 지혜! 언제인가부터 함께 걷는 신비한 발소리! 어디 가서 얻을 수 있겠는가?
오늘도 28km를 걸었다. 이제 135km 남았다. 일주일 안에 끝난다. 행복하기만 했고, 행복을 빼면 남는 것이 없는 이 길이 점점 줄어든다고 생각하니 참으로 안타깝다. 내일부터는 천천히, 느리게 걸어야겠다. 25일의 이 길을 마치면서 드는 결심. ‘언젠가 세상의 모든 길을 다 걸어야 하겠다!’ 〈계속〉
길은 숲속으로 이어진다.
글·사진=송희섭 애틀랜타 시온한인연합감리교회은퇴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