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살에 결혼, 이젠 손자·증손자까지
…고생했지만 같이 지낼 수 있어 행복
…미국이 좋아 불체자로 이민 삶 시작”
한인 이민자 부부 다섯 쌍의 결혼 예순 돌을 기념하는 합동 회혼례가 19일 조지아주 노크로스 시에 있는 조이너스 케어에서 열렸다. 격변의 시대 1960년대 한국에서 부부의 연을 맺었던 이십대 10명이 80살을 넘겨 다시 결혼식장에 들어섰다. 첫 혼례와 달리 다섯쌍의 부부는 손을 꼭 잡은 채 입장했다.
15년 전 딸의 초대로 조지아에 온 동갑내기 김유복(79), 엄옥희(79) 부부는 다른 부부에 비해 나이는 적어도 결혼은 가장 먼저한 선배다. 열아홉에 부부가 됐다. 예쁜 여자 손님이 많기로 소문난 동네 만화방에서 김 씨는 엄씨에게 한 눈에 반했다고 했다.
김유복(79), 엄옥희(79) 부부
“평생 만화 본 적도 없는데 친구들이 그곳에 가면 여자가 많대서 갔죠.” 엄씨에 따르면 “키 작고 집도 절도 없던” 김 씨가 절절히 매달리며 구애한 끝에 결혼을 승락했다. 하지만 젊은 부부는 매사 자존심을 부리며 다투기 일쑤였다고. 엄 씨는 “하루 두 번씩 한 달 칠십 번을 싸웠다”며 “서로 이기려 안달이었다”고 회상했다. 딸 하나, 아들 하나로 시작한 신혼을 지나 이제는 손자 5명, 증손자 4명을 뒀다.
김유복(79), 엄옥희(79) 부부
최명균(83), 최화자(80) 부부의 결혼생활 마디마디에는 굴곡진 이민생활의 애환이 서려있다. 고생 시키지 않겠다는 약속은 못 지켰지만 서로 좋은 배우자가 되자는 약속은 1966년부터 잊지 않았다.
경북 안동에서 경찰로 일했던 최씨는 숙모의 중개로 양반집 외동딸 화자 씨를 만났다. 동짓날 밤 호롱불 아래서 본 남자 얼굴이 “잘생겨서 좋았다”는 아내와 달리 남편은 “장인장모 눈치 보느라 고개도 못 들었다”고 푸념했다.
최명균(83), 최화자(80) 부부
두 사람은 유학 보낸 자식을 따라 30년 전 미국으로 이민, 세탁소를 운영했다. 아침 7시부터 저녁 7시까지 쉬지 않고 일했지만 아내는 일 나간 남편을 기다려야 했던 한국보다 부부가 하루종일 같이 지낼 수 있는 미국이 더 좋았다. 지금은 막내 아들이 세탁소를 이어받았다.
최명균(83), 최화자(80) 부부
반면 김종우(84), 조성숙(83) 부부는 이민으로 오히려 결혼 생활의 고비를 겪었다. 뉴욕에 출장차 왔던 김종우씨가 미국 생활에 한 눈에 반한 게 문제였다. 불법 체류자 신분까지 감수하며 한국으로 돌아가는 것을 거부했다.
“돈 없고 빽 없어도 실력으로 인정 받는 사회라는 게 좋았다”고 한다. 완강한 고집에 결국 아내와 자식들이 졌다. 가발, 스웨터, 공예품 등 갖가지 한국 제품을 미국에 파는 오퍼상으로 생계를 일궜다.
김종우(84), 조성숙(83) 부부
조 씨는 김 씨의 작은 형을 먼저 소개받았다. 김 씨가 데이트 시나리오까지 짜주며 형의 연애를 도왔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관계가 어긋나자 김 씨가 당시 대학 졸업반이던 조 씨에게 본인의 집에서 졸업식 춤을 가르쳐주겠다고 제안한 게 두 사람의 첫 데이트였다. “4·19 혁명으로 세상이 어지러울 때였다. 다른 사람이랑 춤을 못 추게 만들려고 박자도 내 식으로 가르쳤다.”
김종우(84), 조성숙(83) 부부
지나고 나니 호강을 못 시켜줘 미안하다는 김 씨의 말에 아내는 작지만 귀한 선물을 받았던 기억을 끄집어 냈다.
“일가족이 한 집에 살던 시절, 남편이 나와 아이들에게 아이스크림을 사주고 싶었는데 10명 분을 사기엔 돈이 모자라니, 식구가 모두 잠들기를 기다렸다가 늦은 밤 아이스크림을 건넨 적 있다. 모든 방의 불이 꺼지길 기다리며 집 주변만 하염없이 서성인 탓에 다 녹아버린 태극당 아이스크림이 아직도 눈에 선명하다”며 남편을 다시 바라보았다.
취재, 사진 / 장채원 기자 jang.chaewon@korea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