흩어졌던 순례자들 ‘사리아’서 반가운 해후
호젓했던 길이 갑자기 북적북적 “웬일일까?”
# 26일째
어제는 하루 종일 빗속을 걸었다. 뜨거운 물로 샤워를 했는데도 한기가 돌았다. 알베르게 레스토랑에 갔다. 한글로 ‘시래기 국밥’이라고 쓰여 있다. 얼른 주문했다. 조금 후 김이 모락모락 나는 시래기 국밥을 가져다주었다. 서빙하는 스페인 아가씨가 정확한 한국어 발음으로, “시래기 국밥 왔어요. 고춧가루도 있어요. 맛있게 드세요.” 하하하, 크게 웃었다. 고춧가루를 많이 넣고 먹었다. 속이 풀리고 땀이 났다. 어쩔 수 없는 한국 사람!
카미노 순례길에서 먹은 시래기 국.
새벽에는 일찍 깬다. 피곤에 절어 좀 더 자고 싶은데 일찍 깬다. 오늘은 어떤 길이 주어질까, 그 기대에 일찍 깨는 것 같다.
길을 나선다. 전화기에 있는 라이트로 신호를 찾고, 앱으로 확인하면서 걷는다. 시냇물 소리와 워낭소리. 시냇물 소리는 시원하고 워낭소리는 그윽하다.
해가 뜬다. 사물이 보이기 시작한다. 순례자들이 모여 있다. 두 갈래 길 앞에서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고 있다. 어제저녁, 일기예보를 체크하면서 고도를 알려주는 앱으로 이곳을 찾은 바 있다.
알려주었다. “여기에 두 갈래 길이 있다. 하나는 평탄하지만 5km를 더 걸어야 하고, 다른 하나는 험한 산길이지만 5km가 짧다. 오늘 오후에 비가 온다 하니 험하지만 짧은 길이 좋겠다.” 모두 좋다 하고 따라 온다.
오늘은 사리아(Sarria)까지다. 사리아! 이곳은 그동안 흩어졌던 순례자들이 모이는 곳이다. 여기서 모였다가 또 흩어진다. 그리고 최종 목적지 산티아고, 콤포스텔라 성당 앞에서 다시 만나게 된다.
사리아 입구 안내판. 이곳에서 모든 순례자가 모인다
많이들 보인다. 제일 먼저 요하네스 모자. 아들 요하네스와 어머니 모니카, 며칠 전 ‘솔베이지의 노래’를 구성지게 불렀었다. 이름을 잊어버린 브라질에서 온 남매, 1972년에 한국 춘천과 의정부에서 근무했다는 미군 출신 리처드, 오사카 출신에 나고야 대학에서 해양생물학을 전공한 24세의 스즈키, 몇 번이나 이름을 알려주었는데 도저히 발음이 안 되어 그냥 프렌드라고 부르는 68세의 프랑스인.
시도 빼놓을 수 없다. 이름 앞글자가 시로 되어 있어 시라고 부르는 스페인 농민. 카미노를 하다가 종종 중간에서 돌아가기도 했는데, 이번에는 콤포스텔라까지 갈 모양이다. 어디서 배웠는지 몇 마디 한국말을 한다. 갑자가 “개-” 그런다. 웬 개? 보았더니 개 두 마리가 지나가고 있다. 큰놈을 가르쳐 “큰 개-” 작은놈을 가르치며 “작은 개-” 비 온다고 “비-”
이들은 전부 내 얼굴을 기억하고 있고, 내 이름을 정확하게 부르고 있다. 처음 만났을 때, “내 이름은 송(song), 노래이니 잊지 말거라” 라고 소개했더니, 그다음부터는 이름과 얼굴을 정확하게 기억하고, ”노래”, “노래”하면서 반가워한다. 확실히 사람은 조상을 잘 만나 세계인이 부르기 쉬운 이름을 가져야 한다. ‘송’씨 성을 하사하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다.
오늘도 어김없이 성당을 만난다.
# 27일째
벌써 27일 째다. 카미노도 며칠 안 남았다. 아쉬운 마음으로 길을 나섰다. 아무 근심도 없다. 불안도 없다. 부담도 없다. 여자 혼자 걸어도 되는 세상에서 가장 안전하고 거룩한 길이다. 이런 길을 행복하게 걸었다.
여기서부터가 문제다. 갑자기 엄청나게 많은 사람이 몰려 있다. 이렇게 많은 사람은카미노를 시작한 이래 처음이다. 계속해서 저쪽큰길에 관광버스, 일반 버스가 몰려와 사람들을 토해낸다. 기차역 쪽에서도 사람들의 물결이 몰려오고 있다. 무슨 일인가?
카미노의 프랑스 길은 800km다. 그러나 800km를 다 걷지 않아도, 도보로 100km, 자전거로 200km를 하면 카미노를 한 것으로 인정한다. 인증서도 준다. 여기가 100km 바로 전이다. 여기서부터 시작한다. 저 많은 사람들은 100km만 걷고 인증서를 받고자 하는 사람들이다.
돌벽. 길안내 표시판이 성실하게 붙어있다.
와-, 거의 고등학교 수학여행 수준이다. 외다리를 건너갈 때는 병목현상이 일어나 한참을 기다려야 한다. 아침과 점심을 먹어야 하는데 사람이 너무 많아 주문할 수가 없다. 어제저녁, 알베르게 예약이 잘 안 되었다. 원래는 27km 바깥에 있는 알베르게에 예약을 하려 했는데, 22km로 떨어진 곳을 예약할 수밖에 없었다.
늘 조용히 혼자 걸었는데 이게 웬일인가? 바람과 함께 비까지 쏟아진다. 마음이 어수선해진다. 그러나 이내 마음을 잡았다. 어차피 카미노 길은 인생길이 아닌가? 좋은 일, 궂은일, 즐거운 일, 괴로운 일이 다 섞여 있는 인생길. 어려움, 고난, 슬픔, 괴로움, 이 모든 것을 감사로 받으면 행복이 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에 마음이 평온해졌다. 그리고 몸이 힘을 받았다.
갑자기 순례자들이 엄청 많아졌다. 외나무다리에서 병목 현상이 나타난다.
이런 마음으로 계속 걸었다. 바람 속을 걸었고 빗속을 걸었다. 어느덧 날이 저문다. 이제 5일도 남지 않았다. 조바심이 났다. 내 남은 날도 이렇게 빨리 끝이 날 터인데, 어떻게 살아야 하나? 잘 살아야지, 반듯하게 살아야지, 정성을 다해 살아야지, 새삼 마음을 가다듬는다.
글·사진=송희섭 애틀랜타 시온한인연합감리교회은퇴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