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책으로 인생배우기 (27)
‘Mexica’의 어원은 아즈텍족의 언어였던 나우아틀어로 스스로를 불렀던 이름이라고 한다. 현재 멕시코라는 나라 이름은 여기에서 나왔다. 수수께끼의 도시, 아스틀란에서 이주해 왔다는 아즈텍족의 번영은 스페인의 정복으로 너무나 허망하게 무너졌다. 중남미에서 미국으로 이주한 사람을 ‘히스패닉(Hispanic)’이라 부르는 것은 스페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 즉 언어를 기준으로 나눈 명칭이다.
〈A Day’s Work〉 이 그림책은 이제 막 미국으로 와서 영어를 한마디도 못하는 할아버지와 할아버지의 통역을 맡은 손자, 프란시스코가 겪는 힘든 하루에 대한 이야기다. 책표지 그림에서 볼 수 있듯이 두 무릎을 꼭 끌어안고 계신 할아버지 옆에 미국 프로야구 모자를 쓰고 앉은 손자는 자신감 넘치고 여유롭다.
아빠가 돌아가시고 엄마와 둘이 살던 프란시스코 집에 멕시코에서 할아버지가 오신다. 하루 벌어 사는 가난한 이민자 삶이라, 할아버지는 오신 다음 날부터 일거리를 구하려는 사람들이 모인 길모퉁이에서 일을 기다린다.
프란시스코도 이런 곳은 처음이라 달려드는 다른 인부들에게 밀리지만, 정원사를 구하러 온 남자의 모자가 자신이 쓴 야구팀과 같은 팀이라는 동질성을 강조하며 할아버지가 정원사라고 거짓말까지 하여 일을 얻어낸다. 하지만 정원 일을 해본 적이 없었던 할아버지와 프란시스코는 잡초와 화초를 구분하지 못하고, 꽃이 핀 잡초 대신 푸른 꽃나무 싹을 모두 뽑아버린다.
일을 끝내고 흐뭇하게 품삯을 기대하고 있던 그들은 일이 잘못되었음을 알고 당황하며 슬퍼한다. 손자의 거짓말을 눈치챈 할아버지는 내일 다시 와서 잡초를 뽑고 다행히 뿌리가 살아남은 화초를 심겠다고 약속한다.
돈이 필요하면 주기로 한 품삯의 반이라도 주겠다는 고용주에게 할아버지는 정중히 거절하며 내일 모든 일을 잘 끝냈을 때 받겠다고 프란시스코에게 통역시킨다. 정직과 명예를 아는 할아버지의 태도에 고용주는 너그럽게 이해하며, 하루만이 아니라 앞으로 계속 고용할 수도 있다고 말한다.
프란시스코는 빨리 철든 아이 같다. “하루 품삯은 60달러란다.”라는 고용주의 말에 프란시스코는 얇은 셔츠를 입은 할아버지께 사드릴 재킷과 너무 기뻐할 엄마 얼굴과 오늘 저녁에 먹을 수 있을 것 같은 소시지를 생각한다.
아버지가 없는 가난한 집안에서 자란 프란시스코는 평범한 또래라면 몰랐을 통역사역할을 하고, 할아버지를 도와 하루 종일 남의 집 일을 한다. 가족에게 도움이 된다는 뿌듯함으로 가장 기분 좋은 날이라며 불평 한마디 없이 일하는 프란시스코의 모습에 가난했던 나의 어린 시절이 떠올라 마음이 짠했다.
그때는 조숙하다는 말이 듣기 싫었다. 빨리 커버린 내 키처럼 신체적 조숙과 함께 정서적 조숙도 빨리 왔다. 조숙하다는 말을 들으면, 언제나 남의 눈치를 살피며 칭찬받을 일만 하려고 애쓰는 내 모습을 들킨 것 같았고 너무 일찍 익어버린 열매는 제대로 된 맛을 낼 수 없다는 안쓰러움이 담긴 듯했다.
프란시스코의 거짓말은 조숙에서 나온 것이다. 가족에게 돈이 얼마나 간절히 필요한지 알았고,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일이지만 할아버지와 함께 한다면 해낼 수 있을 거라는 얄팍한 계산도 조숙한 아이의 셈법이다.
멕시코는 OECD국가 중에 근로시간이 세계 1위지만 시간 대비 받는 임금은 최하위 수준이다. 넓은 땅과 풍부한 자원과 인구수도 많은 멕시코가 가난한 이유에 대해 어떤 이는 마약 카르텔을, 어떤 이는 지나친 미국 의존도를, 또 어떤 이는 정부의 부정부패와 빈부차를 말한다.
현재 멕시코의 가난은 이 모든 원인이 합쳐진 결과가 맞을 것이다. 안타깝게도 가난한 국가의 피해는 노인, 여성, 어린이가 가장 많이 받는다. 프란시스코의 거짓말보다 소년과 할아버지가 처한 상황에 더 맘이 쓰이는 그림책이다.
챗GPT을 시작으로 계속 진보하고 있는 대화형 인공지능의 이용이 늘어나면서 질문의 중요성이 높아졌다. 질문의 수준에 따라 답의 수준이 결정되니, 잘못된 답이 나오면 질문을 다시 살펴야 한다. AI도 거짓말을 한다. 답할 수 없는 질문을 계속 해대면 거짓말을 한다. 거짓말하는 기계가 아니라 질문자를 나무라야겠지만 생떼처럼 거짓말의 대가도 기계에게 묻고 싶은 하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