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은 죽었다!”고 부르짖은 철학자로 니체를 기억한다. 그것이 니체에 대해 내가 아는 전부였다. 4월 독서클럽에서 읽고 토론할 책이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라는 책인데, 동서 고금의 유명 철학자들 14명의 사상을 훑어보는 책이다. 그 책을 읽는 중에 니체의 영원 회귀설과 초인사상이 흥미로웠다.
니체(1844-1900)의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루터교 목사였다. 그는 라이프치히 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하다, 쇼펜하우어의 걸작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읽고 전공을 언어와 문학을 연구하는 문헌학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니체는 스물네 살에 스위스 바젤 대학의 고전문헌학 교수로 지명되었다. 하지만 그는 교수직을 버리고 조용한 스위스 산속 마을에 가서 은둔 생활을 하며 책을 썼다. 1872년에서 1889년 사이에 14권의 책을 출판했다. 책은 팔리지 않았다. 어떤 책은 니체가 직접 인쇄비를 내기도 했다고한다.
십자군의 패배와 비행들, 면죄부를 사고 팔아 죄를 면하고 부를 축적하는 교회, 종교개혁의 역사적인 갈등속에서 그는 살았다. 합리적인 사고와 과학이 사회를 바꾸기 시작했다. 신을 믿고 순종하면 천당을, 안 믿으면 지옥을 주장하며 교인들을 믿음의 노예로 만드는 모습들 보며 자란 목사의 아들과 손자인 그가 신은 죽었다고 선언했다고 한다. 죽었어야 할 것은 신이 아니라 신을 모시고 관리하는 무당들이 아니었을까?
“네가 지금 살고 있고 지금껏 살아온 삶을 반복해서 수없이 되풀이해야 한다. 그 삶에 새로운 것은 전혀 없고, 모든 고통과 기쁨과 생각과 한 숨, 네 인생의 크고 작은 일 하나하나가 전부 똑같은 순서로 되돌아온다.” 니체의 영원회귀론 골자라고 한다.
영원 회귀론을 읽으니 시지프의 신화를 연상시킨다. 신의 노여움으로 시지프는 무거운 바위 돌을 끊임없이 산 아래서 산 정상으로 밀어 올리고, 정상에서 돌이 아래로 굴러 떨어지면 다시 밀어 올리고, 시지프의 삶이란 바위 굴려 올리기의 반복이다.
최근에 이웃에 사시는 닥터 김이 쇠똥구리가 쇠똥공을 굴리는 것을 보고 영상을 만들었는데, 쇠똥구리가 니체의 영원 회귀론을 본보기로 보이는 것 같다. 쇠똥을 자기 몸보다 몇배로 큰 공으로 만든 쇠똥구리가, 물구나무를 서서 앞 발로 땅을 집고, 뒷발로 쇠똥 공을 글려 언덕을 올라간다. 돌에 막히자 소똥 공이 언덕 아래로 굴러 내린다. 공에 달라붙어 굴려내려 온 쇠똥구리가 다시 쇠똥공을 밀고 올라간다. 그러기를 반복해도 쇠똥구리는 포기하지 않는다.
쇠똥구리는 굴속에 쇠똥을 굴리고 가서 먹고 산다. 쇠똥 속에 알을 낳고 부화한 새끼도 똥을 먹고 자란다. 쇠똥구리가 지구에 존재하는 한 영원히 쇠똥을 공으로 만들어 굴려야 한다. 자자 손손 쇠똥을 굴려 그렇게 살아 간다. 쇠똥구리의 삶이 니체의 영원 회귀설의 본보기 같다.
변화 없이 반복되는 삶, 모든 고통과 한숨, 인생의 크고 작은 일들이 똑 같이 반복되는 삶 속에서 “초인(위버멘쉬)이란, 자기 자신이 되기 위해서, 자신의 의지에 따라,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긍정하며, 그런 자신의 현실을 극복하려는 사람을 가리킬 뿐이지, 국가를 위해서 영웅적으로 무언가를 해내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니체의 말이라고 한다.
많은 사람들은 다른사람들이 어떻게 사는지 모방하고, 눈 앞의 이익만 추구하며 세속적인 가치 속에서 현재의 작은 행복에 만족한다. 니체는 차라투스트라의 입을 빌려 그런 사람들을 ‘독파리’와 같다고 폄하하고, 그런 사람을 넘어선 사람을 초인이라 부른다.
초인으로 가는 과정을 니체는 낙타, 사자, 그리고 어린이로 설명한다. 짐을 진 낙타처럼, 무거운 삶의 짐을 거부없이 지고 견디는 과정, 때로는 기존의 가치, 생활 버릇, 규범을 사자의 날카로운 발톱과 이빨로 공격하여 뜯어 고치는 과정, 어린아이 처럼 새로운 버릇이나 과업에 익숙하여 자기 존재의 자유로움을 나타내는 과정으로 설명한다.
삶은 괴로운 바다라고 한 부처님의 말처럼, 돌아보면 나의 삶도 어려움의 연속이었다. 한 어려움의 해결은 일시적인 기쁨이고 행복이지만, 다른 어려움이 계속 밀려왔다. 초인으로 가는 과정이 정신과 의사 데이비드 호킨스가 자신의 책 〈Power vs Force〉에서 말한 사람들의 의식 진화의 단계와 겹치는 부분이 있다.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용서하는 수용의 단계와 그 다음에 온다는 사랑의 단계, 나의 이웃을 용서하고 사랑하는 단계. 나는 꿈꾸고 있다. 그 단계에 오르는 꿈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