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밑 수북이 떨어져 쌓인 밤과 사과
빗물에 씻고 닦아 먹으며 시장기 달래
막바지 순례길 아껴가며 ‘조금씩 조금씩’
# 28일째
오늘도 일찍 길을 나섰다. 어둠은 짙고 사람은 많다. 보통 이 시간이면 혼자 걸었는데 오늘은 앞뒤로 여럿과 함께 걷는다. 혼자 라이트를 비추면서 신호를 찾고, 앱으로 체크해야 하는 번거로움은 없지만, 이 길만이 가지고 있는 호젓함이 없어져 아쉽기만 하다.
아침 식사 때가 지났다. 시장하다. 눈에 띄는 것이 있다. 주인 없는 사과와 밤이다. 사과나무와 밤나무가 가로수처럼 늘어져 있고, 그 아래 수북하게 밤과 사과가 떨어져 있다. 새와 다람쥐가 먹다 지쳤는지 성한 것이 많다. 잠시 앉아 밤을 주었다. 순식간에 20개를 주웠다. 빗물에 씻고 티슈로 잘 닦아 하나씩, 하나씩 까먹었다. “다람쥐야, 우리 사이좋게 나눠 먹자.” 다람쥐에게 양해를 구하고.
가로수처럼 쭉 늘어선 밤나무 아래로 밤이 수북이 떨어져 있다.
사리아(Sarria) 이후부터 콤포스텔라까지는 만남의 장소라고 하더니 그 말이 맞다. 전에 헤어졌던 사람들을 많이 만난다. 우중이라 판초 우의를 쓰고 있었는데도 용케 알아보고 앞뒤에서 인사를 한다. 서로 허그와 하이파이브로 재회의 기쁨을 나눈다. 그저 눈빛 하나로 반가움을 나누기도 한다.
저기 저 한국 젊은이, 나만 보면 어르신, 어르신 하는 젊은이다. 피레네 산맥을 함께 넘었다. 그 후 여러 번 만났다 헤어졌다 했다. 오늘도 “어르신, 여기서 다시 뵙습니다.” 헤어지면서, “어르신, 또 뵙겠습니다.”
더 재미있는 것은 일본인 스즈키다. 벌써 며칠째 똑같은 패턴이 반복된다. 젊은 사람이 잠이 많다. 늦잠을 잔다. 그래도 내가 새벽에 떠나려고 하면 귀신같이 알고 눈을 비비면서 깨어나 폰을 켠다. “송, 오늘은 어디까지 갈 거야?” “응, 오늘은 여기까지 갈 거야.” “어느 알베르게를 예약했어?” “아무개 알베르게!” “알았어, 이따 봐.” 돌아누워 계속 잔다.
하루 걸음을 마치고 알베르게에 이른다. 침대에 짐을 풀고 씻는다. 씻고 오면 내 침상 2층에 딱-하고 앉아 있다. 나는 아래에서 글을 쓰고 그는 위에서 코를 곤다. 아무래도 콤포스텔라 성당까지 달고 다녀야 할 것 같다.
사람 사는 이야기다. 카미노 길에서 만난 사람들의 사는 이야기! 그래, 산다는 것이 이렇지 별거라더냐. 서로 사이좋게, 평화롭게, 나누며 살면 되는 거지 별거라더냐.
이 십자가 밑에 아들의 유골을 뿌리며 순례하는 아버지를 보았다.
# 29일째
하루 종일 비가 내린다, 성실하게 내리는 빗속에서 성실하게 서 있는 표지석을 의지 삼아 오늘도 성실하게 걸었다.
개와 함께 걷는 부부를 만났다. 전에도 몇 번 만났던 부부. 개에게도 비옷을 입혔지만 이런 비에는 역부족. 개가 비를 많이 맞았다. 조금 틈이 생기니 정성껏 닦아준다. 자기 몸 하나 건사하기도 힘들 터인데, 개 기를 자격이 있다.
비에 젖은 개를 건사하고 있는 순례자
꼬마 하나를 데리고 걷는 가족을 만났다. 이런 때는 도저히 그냥 지나갈 수 없다. 꼬마의 이름을 묻는 것으로 시작했다. 이탄, 5세. 우비 속 이탄의 눈은 초롱초롱했다. 이탄이 너무 어려 생장에서부터 시작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사리아에서부터 시작했단다. 하루에 10km씩, 콤포스텔라 성당까지 10일을 잡고 있다. 이탄을 꼭 안아주었다. 그리고 축복했다.
다섯 살 이탄과 아빠
많은 사람을 만났고 많은 사연을 들었다. 카미노, 이 길에 들어섰다가 중간에 사고를 만나 죽은 아들! 그 아들의 유골을 품에 안고 걷는 아버지의 사연을 들었고, 탈선을 거듭하는 사춘기 아들의 손을 억지로 끌고 걷는 한국인 어머니를 만나기도 했다.
러시아의 침공으로 전쟁터가 되어 버린 조국 우크라이나를 바라보면서, 나이 70이 넘어 입대는 하지 못하고, 조국의 승리를 기원하며 카미노를 한다는 우크라이나 사나이, 우르디메르와 함께 걷기도 했다. 부디 이 길을 걷는 동안, 아버지의 한이 풀어지기를, 어머니의 바람이 이루어지기를, 우크라이나에 평화가 임하기를, 나는 빌었다.
날이 저문다. 오늘을 마감한다. 이제 콤포스텔라까지 38km를 남겼다. 마음먹고 걸으면 내일이라도 끝낼 수 있겠지만, 그러지 않으려 한다. 내일 19km, 모레 19km를 걸어, 모레 오전에 콤포스텔라에 도착하련다. 아름다웠다. 길도, 사람도. 내 앞길 얼마 남았는지 모르겠지만, 나머지 인생길도 이 길과 같기를, 앞으로 만나는 사람들도 이와 같은 사람들이기를!
글·사진=송희섭 애틀랜타 시온한인연합감리교회은퇴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