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리던 반가운 소식이 왔다. 후다닥 집을 나서서 만나러 가는 길에 SXM 라디오에서 비틀즈의 ‘Let it be’ 노래가 나와서 내 흥분을 가라앉혀 주었다. “그렇지. 세상사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거지” 중얼거리며 마음을 달랬다.
그리고 한국에서 비행기타고 온 아직 잉크냄새가 상큼한 책을 들고 앞뒤, 중간을 휙 살폈다. 꼭 2년 전에 지인의 집에 있는 둥근 테이블에 앉아서 시작한 글동무들의 모임이 2년 후에 이렇게 작은 책자, ‘잠깐만요! 몽고메리 여인들 이야기’ 로 봄의 싱싱한 푸른색으로 단장하고 마주선 것에 뿌듯했다.
2년 전, 조금 낯선 일을 시작했다. 변호사였던 단과 그의 독일계 아내 을술라를 흑백문제 해결을 위해 결성된 시민단체인 ‘One Montgomery’에서 오랫동안 함께 활동하며 친해졌다. 그 부부는 뉴햄프셔주로 이사 갔다. 언젠가 남편과 동북부 여행중에 대서양변의 작은 도시, 엑시터로 그들 부부를 만나러 갔었다. 내가 글을 쓰는 것을 알던 단은 나를 약 올렸다. 새로 이주한 곳에서 만난 사람들과 매주 원탁 테이블에 둘러앉아 대화하다가 같은 주제로 글을 쓰니 각자의 다른 살아온 배경이 글 속에 녹아서 좋다고 했다. 나도 그런 기회를 갖고 싶어 부러워 했던 것을 둘러 앉은 여인들에게 우리도 해 보자고 제안하니 모두 동의했다.
우리는 조금 다르게 시작했다. 글 주제를 미리 선택하고 생각할 기회를 갖지 않았다. 매주 모여서 각자 그 순간에 떠오른 단어를 작은 쪽지에 적고 그것을 접고 섞어서 그 중에서 하나를 집었다. 그날의 제목으로 선택된 주제로 즉석에서 20분동안 글을 쓰는 것은 도전이며 동시에 자신을 들어내는 힘든 작업이었다. 하지만 모두 진지하게 어떤 주제라도 먹고 소화시키는 에릭 칼의 아주 배고픈 애벌레들이 되었다. 쓰고 나서 노트를 돌려서 옆의 사람이 글을 읽으면 타인이 읽어주는 내 글에는 색다른 맛이 붙어서 정감이 있었다.
사실 예전에 책을 출판한 적이 있는 멤버들도 그렇지만 새로 글쓰기에 용감하게 뛰어든 사람들은 단시간에 주제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투명한 언어로 엮어서 표현하는 것이 쉽지 않지만 모두 거뜬히 해냈다. 횟수를 거듭하면서 불과 20분의 시간에도 좋은 글들이 나와서 자신의 목소리를 찾아가는 좋은 글쓰기 여정을 우리는 꾸준히 계속했다. 그리고 조금 충동적인 일도 했었다. 각자 한 챕터씩 맡아서 단편소설을 여럿 썼고, 하루에 시 한편 씩 읽는 것도 계속하니 사고의 폭이 넓어진다.
책 읽는 것을 좋아하는 여인들은 생각이 깊다. 세상살이에 엉킨 실타래를 풀어가며 과거와 현재를 잇고, 살며 얻는 깨침을 글로 써서 애틀랜타 중앙일보 지면을 통해서 타인들과 나누었다. 그렇게 아기자기한 인생철학을 가지고 세상을 관조하는 당당한 여인들이 애벌레에서 아름다운 나비들로 변신하는 과정을 작년 가을부터 책으로 묶고 싶다는 꿈을 꿨다. 처음에 망설이던 멤버들이 조금씩 동조해서 드디어 올 봄에 결실을 봤다.
책을 들고 돌아오는 길에 다시 라디오를 틀었다. 이번에는 Cat Stevenson의 ‘Morning has broken’ 노래가 흘러나와서 무릎을 쳤다. 책을 만나러 갈적에도 그랬지만 돌아올 적에도 내 마음을 이해하는 노래를 듣게 되다니 이것 또한 신기했다.
집에 돌아와 앞 페이지부터 마지막 페이지, 그 중간에 있는 모두의 글을 차근차근 다시 읽었다. 전에 읽었던 글들이 책속에서 새로운 면모를 보여줬다. 각자 가진 소중한 기억의 파편들이 너와 내가 아닌 우리의 스토리로 모였다. 삶의 증언으로 결집된 글들이 열심히 자신의 생활을 가꾸는 오늘의 우리 모습이며 모국어 한글 사랑이었다. 어제가 소중하니 오늘도 소중해진다. 아름답게 사는 여인들의 수고를 보여주는 책 속의 글들은 가족과 지인만이 아니라 타인에게도 공감을 줄 것이다.
사람을 사랑하고 문학을 사랑하는 글동무들이 서로 격려하며 좋아하는 일에 집중해 열성을 피우는 노력에서 모두 긍정적인 에너지를 얻는다. 그리고 한번 엮인 인연은 타지로 이사를 가도 여전히 함께한다. 새롭게 조인한 멤버들 역시 스스럼없이 섞였고 20분 글쓰기를 부드럽게 소화하니 몽고메리 여성문학회가 저절로 탄생했다. 책 속에 “생각은 깊어져도, 글은 단순하고 맑아졌으면 좋겠다” 한 멤버의 목소리가 이 책의 조용한 울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