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에 극장에서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의 HD 라이브 공연을 보며 나는 픽션과 논픽션의 분명한 차이를 내 속에서 무너뜨렸다. 아픈 역사적 배경과 창작의 결정체는 묘하게 한데 버무려져서 생생한 현실감을 줬다. 나에게는 허구와 사실, 둘 다 중요하다.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의 2023~24 시즌 마지막 작품인 푸치니의 ‘나비부인’은 스토리 자체가 아릿한 아픔을 준다. 워싱턴DC에 있는 케네디센터에서 실연을 보았을 적에도 그랬지만 매번 극장에서 볼적마다 독특한 무대설정과 세계적인 오페라 가수들의 열연으로 새롭게 만나는 작품이다. 이번은 일본의 전통인형극 ‘분라쿠’를 도입한 멋진 공연이었다.
19세기 말 일본에 상륙한 미해군함정 소속의 해군장교 핑커톤은 15살 미모의 게이샤 초초상에게 혹해서 그녀와 일본식 결혼을 한다. 남편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그녀가 그의 기독교 종교까지 받아들이자 전통을 중시하는 일본사회는 그녀를 완전히 소외시킨다.
그저 젊은 욕망으로 단순한 게임처럼 그녀를 현지처로 맞아들여 살던 그는 본국으로 돌아가고, 돌아온다는 그의 약속을 믿는 그녀는 혼자 아들을 낳고 힘겹게 살면서 일편단심 민들레로 애절하게 그를 기다린다. 3년 후 다시 돌아온 그는 미국인 아내를 데리고 나타나서 아들을 데려가려고 한다. 그녀는 남편의 다른 아내를 보자 자신의 상황에 절망하고 자결한다.
‘나비부인’과 같은 스토리라인을 가진 작품이 있다. 월남전을 배경으로 만들어진 뮤지컬 ‘미스 사이공’ 이다. 오래전 애틀랜타 시빅 센터에서 이 뮤지컬을 봤을 적에 무대위에 내려온 헬리콥터 등 긴박감 있고 격정적인 스토리에 매료 당했다.
슬픈 스토리라 마음 아팠지만 생생하게 묘사되던 극적 상황이 지구 여러 곳에서 사람들의 삶 속에 계속 일어나고 있음에 공감대가 컸다. 그후 런던무대에서나 코네티컷주의 하트퍼드에서 봤을 적에도 무대설정은 조금 달랐지만 전쟁이 남긴 강한 상처는 같았다.
전쟁통에 부모를 잃고 술집에 일자리를 찾은 17세 킴은 미군병사 크리스와 사랑에 빠져서 월남식으로 결혼식을 치룬다. 하지만 미군이 철수하자 남편은 귀국했고 뒤에 남은 그녀는 전후의 혼란을 견디다 방콕으로 가서 술집에서 일하며 혼자 낳은 아들을 키운다. 언젠가 남편이 그들 모자를 미국으로 데려갈 날을 기다리던 그녀에게 남편은 미국아내를 데리고 나타난다.
초초상과 킴. 동양여성의 순종적인 자세로 자신의 상황을 받아들인 그들은 비록 나이는 어리지만 강인한 모성애를 보인다. 미국 아내를 가진 남편과 한판 싸워볼 의도가 애초부터 없었던 것은 남성우월주의 시대적 환경의 피해자의식이다.
냉정한 현실을 감수하고 아들을 위해서 자신을 희생하기로 단번에 결정 내린 두 여자가 자살하기 전에 어린 아들과 작별하며 똑 같이 훗날 “나를 꼭 기억하라” 고 당부한다. 자신의 어린 아들이 아버지의 나라에서 자유롭고 당당하게 살기를 바라며 기회의 땅 미국에 아들을 맡긴다.
오페라를 보고 눈물을 훔치며 ‘미군과 동양여인’ 을 생각하니 지난주 앨라배마 북부 도시 헌츠빌에 며칠 머물면서 만난 리사 윌리엄스가 떠올랐다. 사실 전세계 곳곳에 발령받아 나간 미군들이 모두 품행 방정하지 않으니 많은 사연들을 만들지만 리사는 오페라와 뮤지컬에 소개된 불운의 여인들과 전혀 다른 동양 여인이다.
리사의 스토리는 한 미군을 통해 삶이 바뀐 사례이다. 월남전이 한창일 적에 월남의 농촌에서 태어난 리사는 3살때 소아마비로 왼쪽 다리가 짧은 신체장애자가 됐다. 예방 접종은 고사하고 의료시설이 전혀 없는 환경에서 홀어머니와 주위의 동정을 받던 모녀는 한 착한 미군을 만났다.
그는 리사의 어머니와 결혼하고 모녀를 미국으로 데려와서 사랑으로 돌봤다. 자유와 기회의 나라에서 뭐든 최선을 다하라며 자신을 키운 양아버지는 천사라며 그녀는 자신이 7월4일 미국 생일에 태어났으니 어쩌면 미국인이 된 것은 우연이 아니라고 믿는다.
화학공학을 전공한 리사는 결혼해서 아이를 키우며 지역사회에 기여하는 다양한 역할을 왕성하게 한다. 현재 그녀는 엔지니어링 서비스를 제공하는 ‘Soldier 1 Corporation’의 사장이며 헌츠빌의 록 밴드 JED Eye의 멤버다. 전기 기타를 들고 긴 검은 머리 찰랑이며 전신으로 삶의 아름다움을 노래하던, 만사에 억척스런 그녀를 보면서 내 가슴이 뛰었었다.
비극적인 창작품도 좋지만 아메리칸 드림을 완벽하게 이룬 한 동양여인의 실제 스토리가 있는 우리사회는 진실로 아름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