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독자들, 사인받으려 긴 줄…”몰랐던 한국 역사 알게 돼”
“세계 여러 작가도 제 나이엔 절필 선언을 했지만, 저는 조금 더 쓰려고 합니다. 아, 이 지팡이는 오늘 아침에 화장실이 미끄러워 넘어져서 그런 것이고 저 쌩쌩합니다.”
17일(현지시간) 저녁 영국 런던 사우스뱅크센터 무대에 오른 81세 원로작가 황석영이 지팡이를 만지면서 한 말에 객석에서 큰 웃음과 함께 우렁찬 박수가 터져 나왔다.
이날 황 작가는 영국 최고 권위의 문학상인 부커상의 국제 부문 ‘인터내셔널 부커상’ 최종 후보로서 부커상이 주최한 낭독회에 참석했다.
철도 노동자 삼대와 공장 굴뚝에서 고공농성을 하는 해고 노동자를 통해 한반도 근현대사를 담아낸 소설 ‘철도원 삼대'(영제 ‘Mater 2-10’)는 다른 5개국 작품과 함께 이 상 최종 후보에 올랐다.
황 작가는 이날 무대에서 소설 일부를 발췌해 낭독하고 나서 1989년 3월 방북했을 당시 동향(영등포)의 전직 철도 기관사와 만난 것을 계기로 이 소설을 구상한 과정을 소개했다.
이 둘은 당시 과거 영등포에서 났던 화재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면서 같은 시기에 비슷한 곳에서 지냈던 사실을 확인했다고 한다.
황 작가가 당시 화장실이 불에 타 온 동네에 냄새가 진동했던 일화를 전하자 관객들 사이에서는 탄식과 웃음이 터져 나왔다.
소설가 황석영이 17일(현지시간) 저녁 런던 사우스뱅크센터에서 열린 인터내셔널 부커 최종 후보 낭독회에서 ‘철도원 삼대'(Mater 2-10)를 낭독하고 있다. 주영한국문화원 제공
황 작가는 “두 가지 생각을 했다. 하나는 우리 한국 문학에서 근대 산업 노동자들의 삶과 투쟁을 다룬 적이 없으니 그 빠진 얘기를 내가 채워 넣고 싶었고 또 하나는 영등포에서 살았던 어릴 적 추억을 담은 소설을 쓰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이 책의 구상 이후 실제 집필까지는 30년이 걸렸다.
그는 “망명과 징역살이 이후엔 검열이 있었고 검열 해제 이후에도 일제강점기 사회주의 운동을 정면으로 다루는 게 힘들어 시간을 기다렸다”며 “팬데믹 기간에 이 작품 집필에 매달렸다”고 말했다.
황 작가는 “78세에 썼으니 꽤 늦은 나이”라면서 “절필이 간단한 선택일 수 있지만 조금 더 쓰려고 한다. 세 편을 더 쓰면 될 것 같다”고 했다.
인터내셔널 부커상은 번역가가 작가와 나란히 후보로 이름을 올리며 수상시 5만파운드 상금도 균등하게 나눠 받는다.
번역가 소라 김 러셀(김소라), 영재 조세핀 배(배영재)도 이날 함께 무대에 올랐다.
인터내셔널 부커 최종 후보작 낭독회에서 ‘철도원 삼대'(Mater 2-10) 작가 황석영(왼쪽에서 두번째)과 번역가 소라 김 러셀(오른쪽에서 두번째), 배영재(맨 오른쪽)가 무대에서 발언하고 있다.
김 러셀 번역가는 번역 시 특히 어려웠던 점을 질문받자 호칭의 문제를 꼽았다.
그는 “영어에서는 개인 이름과 대명사를 쓰지만 한국어는 언니, 선생님, 직위 같은 관계에 따른 용어를 쓴다. 그것도 누가 누구에게 말하는지, 또 문맥에 따라 달라진다”고 설명했다.
이어 대명사를 사용해 인물 간 관계를 들어내고 동떨어진 개인으로 만들면 이야기가 달라지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면서 “영재와 얘기해 다시 돌아가 관계를 지킬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이 작품은 이백만과 이일철·이철, 이지산으로 이어지는 철도 노동자 삼대의 역사가 한 축, 오늘날 고공농성을 하며 가족사를 회고하는 이백만의 증손 이진오의 이야기가 다른 한 축이다.
사회 변화의 풍랑에 휘말리는 노동자들의 거친 이야기에 주안댁과 막음, 신금이, 윤복례가 펼치는 민담 같은 가족사가 찹찹하게 쌓여 균형을 잡는다.
김 러셀 번역가는 “언어와 문화가 사라지는 것을 막고 각 인물이 동떨어진 개인이 아님을 보여주려 했다”며 “이건 영웅담이 아니라 공동체, 함께하는 사람들, 그들의 소통에 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철도원 삼대’ 외에 다른 작품들 작가와 번역가도 참석한 가운데 열린 이날 행사장의 객석 295석은 거의 다 들어찼다.
17일(현지시간) 저녁 런던 사우스뱅크센터에서 인터내셔널 부커 낭독회가 끝난 후 독자들이 ‘철도원 삼대'(Mater 2-10) 황석영 작가와 번역가 사인을 받기 위해 기다리고 있다.
끝나고 나서 이어진 사인회에서도 독자들은 책을 들고 작가와 번역가의 사인을 받기 위해 줄을 지어 섰다. 그중에서도 황 작가와 김 러셀·배 번역가의 사인을 받으려는 줄은 눈에 띄게 길었다.
에리카 퍼버트 씨는 이미 전자책으로 ‘철도원 삼대’ 영문판을 읽었지만, 현장에서 종이책을 한 권 더 구입했다고 했다.
그는 “여러 세대에 걸친 가족 이야기가 정말 좋다”며 “예전에는 한국과 일본의 관계에 대해 잘 몰랐는데 많은 것을 알게 됐다. 모르는 것은 검색해 보면서 읽었다”고 말했다.
또 다른 독자 트레이시 멀리건 씨는 “오늘 프레젠테이션이 무척 흥미로웠다”며 “황 작가가 아주 열정적이고 말을 아주 재미있고 유머러스하게 해서 배우를 해도 될 것 같다”고 말했다.
수상작은 오는 21일 런던에서 열리는 시상식에서 발표된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