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책으로 인생배우기 (28)
시 쓰기를 배우면서 가장 집중했던 것이 ‘낯설게 하기’였다. 러시아 형식주의 문예비평의 핵심이라 불리는 이 방법은 익숙한 대상이나 상황을 작가의 시선으로 은유, 역설 등을 써서 다르게 형상화시키는 기법이다. 공부를 하면서 내 머릿속에 자꾸 떠올랐던 책이 있다. 스위스의 국민작가라 할 수 있는 페터 빅셀의 〈책상은 책상이다〉.
이 책에 나오는 주인공들은 엉뚱한 생각으로 자신만의 답을 찾으려는 늙은 남자들이다. 특별함이라고는 없는 일상을 살던 늙은 남자는 무언가 변화를 만들고 싶어 모든 사물의 이름을 바꾸어 부르기로 한다. 침대는 사진, 의자는 시계, 책상은 양탄자… 이렇게 모든 사물을 자신만의 이름으로 부르던 그는 점점 사회로부터 고립된다. 결국 다른 사람들의 말을 이해할 수 없게 되었고, 더 슬픈 것은 다른 사람들이 그의 말을 이해할 수 없게 된다.
미국을 대표하는 어린이책 작가 신시아 라일런트의 그림책 〈The Old Woman Who Named Things〉에는 사물에 이름 짓기를 좋아하는 할머니가 계신다. 낡은 자가용은 베치, 의자는 프레드, 침대는 로잰느… 하지만 할머니는 자신보다 오래 살 것들에게만 이름을 지어 준다는 원칙이 있다. 친구들이 세상을 다 떠나 버려, 편지 한 통조차 받을 일이 없는 할머니는 이름을 불러 줄 사람도 이름을 부를 사람도 없다. 그래서 할머니는 떠나보내는 아픔과 남겨지는 슬픔을 누구보다 잘 알고, 아는 만큼 두렵다. 할머니에게 이름을 지어 주고 부르는 일은 마음을 주고받는 일이다.
어느 날, 할머니 집에 떠돌이 강아지 한 마리가 찾아온다. 배고픈 강아지에게 할머니는 먹이를 주지만 어서 집으로 돌아가라 하며 이름을 지어주지는 않는다. 착하고 예쁜 강아지이나 오래오래 같이 살지 못할 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날마다 할머니가 주는 먹이를 먹고 강아지는 무럭무럭 자라 어엿한 개가 되지만 할머니는 여전히 개에게 이름을 지어주지 않고, 개보다 오래 살아야 한다는 걱정이 없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던 어느 날부터 개는 할머니 집에 찾아오지 않는다. 마음이 허전하고 쓸쓸해진 할머니는 개를 찾아 온 동네를 돌아다니고, 개들을 보호하는 사육장으로 달려가 개를 찾는다. 개 이름을 묻는 사육사 앞에서 할머니는 자신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 친구들의 다정한 얼굴과 사랑스런 이름을 떠올리며 “우리 개 이름은 ‘러키’랍니다!”라며 자신 있게 대답한다. 이별의 두려움을 이겨내고 마침내 러키를 가족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러키와 함께 살게 된 할머니가 오래오래 따뜻했으면 좋겠다. 어쩌면 할머니가 두려워했던 것처럼 또다시 상실의 아픔을 겪을 수 있고, 오히려 러키가 다시 떠돌이 개가 될지도 모르겠지만 할머니와 러키가 함께 하는 순간만큼은 따뜻하고 행복한 시간들이 분명할 거다. 나이가 어리고 상실과 상처에 대한 두려움이 없어도 새로운 관계를 맺는 일은 쉽지 않다. 영원한 건 절대 없고 결국엔 다 변하는 게 인생이기에.
그래도 우리가 두려움을 이겨내고 용기를 내는 것은 영원한 행복을 위해서가 아니라, 낡았지만 힘차게 굴러가는 자동차를 타다가 잠시 바라본 풍경과 아침에 침대에서 나누는 따스한 인사와 우연히 정원에서 발견한 이름 모를 꽃의 설렘처럼, 모두 잠시의 행복 때문이다. 그리고 어쩌면 내일은 이런 잠시의 행복을 또 찾게 되지 않을까하는 바람 때문이다.
지난 몇 해 동안 가보지 못한 장미꽃 축제에 올해는 운 좋게 가볼 수 있었다. 코틸리온, 블루문, 썸머레이디, 아메리카… 다양한 장미꽃들이 모두 자기 이름표를 달고 있었다. 처음에는 이름표 하나하나를 읽으며 이름을 외워보려 애썼지만 이내 포기하고 말았다. 종류는 너무 많고 이름은 길고 어려웠다. 이름을 몰라도 장미는 탐스럽게 아름다웠고 향기로 정원을 가득 채웠다.
때로는 이름을 지우면 오히려 더 또렷이 보이는 것들이 있다. 책상을 양탄자라 불러도, 침대를 로잰느라 불러도 나만의 특별한 책상과 침대의 느낌은 변하지 않는다. 나만의 느낌을 나눌 친구가 필요하다면 용기 내어 이렇게 말하면 된다.
“나이 상관없이 오래오래 친구할 사람! 손들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