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Beef:성난 사람들’ 이야기
도로에 차들이 멈춰서 있다. 약속시간에 늦은 터라 연신 시계를 봤다. 사고가 났나, 괜히 이길로 왔네… 짜증이 몰려오는 순간 떠오르는 영화가 있었다.
“Beef 비프(성난 사람들)” 는 넷플릭스의 10부작 드라마다. 두 주인공은 각자의 스트레스로 특정할 대상도 없는 짜증을 억누르며 살아가는 아시아계 이민자들이다. 남자 주인공인 대니 (스티브 연 분) 는 한국계 이민자로 번듯한 직업을 갖지 못했으면서도 집안의 기둥 역할을 하고 싶어 한다. 하지만 “그렇지 .. 꼭 뭐가 있어” 라는 대니의 말에서 알수 있듯이 제대로 되는 일이 없었다. 여자 주인공인 에이미(앨리 웡 분)는 번듯한 사업체를 가지고 풍족한 생활을 하는 중국계 이민자다. 겉으로 보기에 행복할 것같은 그녀는 사업상의 스트레스로 곧 터져버릴 것같은 아슬아슬한 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불행한 어린 시절을 보낸 에이미는 조건없는 사랑이 존재 할까… 하는 의문을 갖는다.
그 둘이 마켓 파킹장에서 맞닥들였다. 시끄러운 경적소리와 고함, 경멸의 손가락질은 화약창고에 던져진 작은 성냥불이었다. 감독은 이 첫장면을 시작으로 점점 과열되어가는 인간의 분노를 어처구니 없을 정도로 과격하게 보여준다. 한사람의 보복은 곧이어 다른 사람의 보복으로 이어지고 악연이 거듭되면서 둘은 파국으로 치닫는다. 흥미로운 점은 이 둘이 결코 악당은 아니라는 것이다. 의도적인 보복이 의도치 않은 결과로 이어지기도 하면서 자신들도 통제할 수 없는 나락으로 떨어져 갔던 것이다. 각자의 삶을 파멸로 이끈 드라마의 결말은 그다지 아름답지 않다. 하지만 마지막 장면인 사막에서의 대화는 무척 인상적이다. 둘만 남은 어둠의 밑바닥에 이르자 비로소 그들은 서로의 깊은 내면을 마주하게 된다. 분노는 결국 억지 웃음을 짓고 살았던 자신에 대한, 또 세상을 향한 외침이었다는 것을 느끼며 아픔을 공유하고 위로한다. 그리고 서로에게 기대어 사막을 빠져 나온다.
우리가 참아야 한다고 배운 분노의 감정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이 드라마는 2023년 에미상 8관왕을 기록했다. 감독은 물론 (한국계 미국인 이성진) 배우들 또한 아시아계 이민자들이어서 미국 방송계를 떠들썩하게 했던 작품이다. 작품을 만드는 동안 감독의 가슴에는 북극성처럼 내내 길을 밝혀주는 문구가 있었다고 한다. “사람은 빛의 형상을 상상해서가 아니라 어둠을 인식함으로써 깨달음을 얻는다” 는 칼 융(Carl Jung) 의 말이었다. 어두운 곳을 밝게 비추는 것이 깨달음이라는 것이다. 평안하고 멋진 삶이 아닌 추악하고 감추고 싶은 곳에서부터 자각을 해야 한다는 뜻일게다. 감독은 분노라는 어두운 곳에서 삶의 본질을 얻고자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자신의 부정적인 감정을 드러내는 것을 두려워 한다. 혹시 나를 미워하지 않을까. 나만 소외되는 건 아닐까 하는 불안으로 가슴 속에 꽁꽁 숨겨 놓고 억지 웃음으로 고개를 숙인다. 하지만 세상은 끝없이 돌을 던진다. 간혹 반감도 품어 보지만 곧 다시 고개를 숙인다. 그리고 생각한다. 나는 인정받지 못하는 사람인가… 나를 조건없이 받아주는 곳이 있기는 할까… 라는 설명 할수 없는 감정에 휘둘리며 대니처럼 자살을 생각하기도 하고 에이미처럼 정신상담을 받으러 다니기도 한다. 불안은 곧 대상을 특정할 수 없는 분노가 되고 그 분노는 대상을 찾으면 거침없이 쏟아져 나온다.
하지만 쏟아 낸 분노가 자신의 가치를 확인받고 싶은 몸부림이었다는 걸 안 순간, 그리고 같은 아픔을 우리 모두가 갖고 있다는 것을 자각한 순간 작은 빛 하나가 어둠을 가르듯 우리는 서로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물론 이런 이해만으로 ‘불행 끝 행복 시작’ 이라는 동화같은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한번의 이해는 다른 이해의 밑거름 일 뿐이다. 하지만 이런 관계 속에서 우리는 정이 든다. 우리말로 미운정이라고 하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일게다. 미운정 고운정 들이면서 서로 의지하고 사막이라는 고된 길을 같이 걸어 가는 것이 인생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한국인으로서 영화를 보는 재미 또한 쏠쏠하다. 한국말 특히 엄마 라는 말을 들을땐 가슴이 뭉클하고 라면을 먹는 장면에서는 반가움에 미소가 절로 지어진다. 우리의 말과 문화를 이렇게 잘 소화해 낸 감독이 자랑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