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 결혼의 의미는 고전적이었다. 현모양처를 만나 예쁜 아이 낳고 오순도순 사는 삶을 꿈꾸었다. 모든 것은 변하는 게 순리인데 드라마나 영화에서 사랑은 지고지순했다. 사랑은 늘 변하지 않고 그 자리에 머물러 있는 옹달샘이라서 투명하고 청량한 느낌을 주었다. 이미지로 보이는 사랑의 완성은 늘 결혼이었다. 그래서 결혼은 법제화됐고, 법의 보호를 받는다고 여겼다. 그와는 반대로 결혼을 깨고 가정을 깨는 일은 부도덕한 행위라고 여겼다. 불륜, 첩, 간통의 주인공들은 나쁜 사람이고, 조강지처는 착한 사람이라는 캐릭터가 성립됐다.
결혼은 남녀간의 중대한 약속이다. 보통 반지로 하는데 정표로 준비하는 예물은 사회통념상 누군가의 아내요 남편이 있다는 표식이 된다. 그래서 반지를 빼게 되면 임자 없는 사람으로 여겨진다. 심지가 굳은 사람들은 격식을 차리듯 그런 혼란을 만들지 않지만, 불편하다는 이유로 반지를 끼지 않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다. 여기서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미혼인 줄 알고 사귀다 불륜에 빠지는 일이 생긴다. 둘만의 물질적인 교환은 더불어 성의가 묻어나는 표식이 된다. 금반지의 상징은 99.9%의 사랑을 의미하며 변하지 않는 속성은 결혼의 의무를 다하겠다는 다짐도 들어있다. 결혼은 인생을 함께하기로 한 약속이다. 그러기에 둘만 어는 사실이 아닌 이 세상에 공표한 결혼을 기대에 못 미친다고 설레어 한 결혼을 신중하지 못한 선택이라고 되물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후한의 개국황제 유수는 근엄하고 반듯한 사람이었다. 창업 군주에게 흔히 발견되는 파격과 거친 면을 찾아볼 수 없었다. 매사를 신중하게 중론을 물어가며 온건하게 처리했다. 그는 부드러움이 강함을 이긴다는 통치술을 체득한 사람이었다. “저는 부드러운 도리로 천하를 얻었을 뿐 아니라, 또한 부드러운 도리로 천하를 다스리고 있다”고 말하곤 했다. 후대 학자들은 이를 유도치국(柔道治國)이라고 불렀다. 전국을 평정한 광무제는 모든 면에서 무리하지 않고 우선 민생회복에 주력했다. 광무제의 이런 정치 자세는 시기에 매우 적합했다. 당시 격심한 전란으로 백성들의 생활은 궁핍의 극에 달해 있었다. 광무제 자신의 성격도 억지로 밀고 나가지 않는 유연한 성격의 소유자였기에 그런 시대의 국정 담당자로서는 확실히 적임이라고 할 수 있겠다.
광무제가 끔찍이 아끼는 신하 가운데는 송홍을 비롯하여 신중하고 근후한 인물들이 많았다. 광무제의 누이 가운데 호양 공주라는 미망인이 있었는데 그녀는 은근히 송홍에게 호의를 가지고 있었다. “송홍의 위풍당당한 용모와 덕에 넘치는 기품은 감히 다른 사람들이 따르지 못할 것입니다.” 그녀는 항시 이렇게 말하며 송홍을 은근히 흠모하고 있었다. 광무제는 이 같은 누이의 심정을 알아차리고 송홍에게 넌지시 이야기할 기회를 찾고 있었다. 어느 날 송홍이 입궐하여 광무제를 알현하자 광무제는 호양 공주를 병풍 뒤에 숨겨 놓고 넌지시 송홍의 뜻을 떠보았다. “사람이 부자가 되면 친구를 바꾸려 하고, 귀하게 되면 아내를 바꾸려 한다는 속담이 있는데 인정이란 과연 이런 것일까.” 송홍은 근엄한 표정을 지으면서 말했다. “소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가난할 때 사귄 친구는 잊어서는 안 되며, 구차하고 천할 때 고생을 같이하던 아내는 절대로 내쳐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송홍의 굽힐 줄 모르는 태도에 감동한 광무제는 살짝 공주를 돌아보면서 말했다. “도저히 안 되겠습니다. 단념하는 수밖에 없겠습니다.” ‘빈천지교(貧賤之交)는 불가망(不可忘)이요, 조강지처(糟糠之妻)는 불하당(不下堂)’이라는 말은 여기서 유래한 말이다.
그러나 어쩔 것인가. 세상은 변했다. 불편한 것은 편리하게 하려고 바꾸는 것이, 그렇게 하는 게 요령있게 사는 사람으로 받아들여지는 세상이 되었다. 교통은 뚜벅이에서 자전거로 버스로 승용차로 전철로 비행기로 승차감뿐만 아니라 속도감까지 있게 변했다. 스피디한 시대에 결혼은 마음에 들면 바로 하고, 승차감이 나쁜 자리라면 갈아타는 세상에 이혼율이 늘어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추세라고 보겠다. 사람과의 거리는 비용에 의해 가까워진다. 알지 못하는 사람들 간에 결혼정보회사가 다리를 놓고 이력서는 둘의 관계를 어제 알던 사람처럼 만든다. 좁은 관계망 속에서 지인의 소개로 만날 수 있는 경우는 당연히 줄어든다. 만남도 인위적이고 작위적이라 인연 보다는 클래스가 있고, 레벨이 있다고 한다. 인연을 중시하던 과거처럼 서로 좋아서 눈맞아 하는 자연스러운 결혼은 이제 천연기념비가 되었다.
사회적 평가의 가치를 식별하기 쉽게 학벌, 배경, 직업을 기준으로 사람을 물건처럼 상품화시키는 시대다. 무엇을 보고 평가해야 사람을 믿을 수 있는가? 지불한 돈에 비해 저울에 고기를 근수대로 받기 위해 하는 행위나 마찬가지이다. 장사는 밑지지 않으려는 속성을 갖고 있다. 부부는 무촌이라고 한다. 부부는 촌수로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가깝다는 의미이기도 하고 헤어지면 남남으로서 아무런 관계도 아닌 정말로 촌수가 없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옛날 어른들은 ‘조강지처 버리면 패가망신한다’고 했다. 바람을 피워도, 첩을 두어도, 조강지처는 깍듯이 예우했다.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재벌인 이병철, 정주영, 신격호 회장 등이 그랬다. 어느 재벌 부부의 이혼소송이 뜨거운 화제가 되고 있다. 서울고등법원 가사2부는“최태원 SK 회장이 노소영 관장에게 재산분할 1조 3808억 1700만원, 위자료 20억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최태원 회장이 일부일처제를 존중하지 않았다’는 재판장의 질타가 놀랍다. 물론 여자들은 이번 판결에 대해 여자들은 ‘여성에 좋은 선례를 남겼다’고 환영일색이다. 일각에서는 ‘최소 위선적이지는 않다’며 최 회장의 입장을 이해하기도 했지만, 그의 당당함에 대한민국 조강지처들은 공분한 것이다. ‘칠거지악’을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르던 남자들의 전성시대는 이제 끝난 것이다. 만천하의 사나이들이여 명심하자. “조강지처 버리면 벌 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