빠르게 다가온 뜨거운 계절에 몸과 마음을 활짝 연다. 나는 이 화끈하고 열정적인 계절, 여름이 좋다. 이른 아침에 뜰 일을 하고 집안에 들어와 땀을 닦으며 마시는 뜨거운 커피는 신선한 하루를 열어준다. 창밖에서 하늘 높이 오른 해가 해바라기를 부르면 이제 곧 활짝 웃을 해바라기 들판을 생각하며 나도 해바라기가 되는 착각에 빠진다. 태양을 향하여 일편단심 얼마나 멋진가.
하늘을 보고 부끄럽지 않도록 살겠다고 맹세한 옛날부터 나는 부끄러운 일을 한 후에는 하늘을 보지 않았다. 하지만 기쁜 일이나 슬픈 일이 있었을 적에는 늘 하늘에 손을 내밀었다. 그렇게 순전히 내가 중심이 되어서 사회환경과 타협하고 이기적인 일상을 살며 달력을 넘겼다. 세월이 지나 남들이 하는 나이와 함께 바꾸어야 하는 생활습관도 묵살하며 계속 내 방식으로 사는데 만족했다. 그러다가 어제 쇼핑하다 내 의식을 깨우친 일이 있었다.
가게에서 우아한 디자인의 예쁜 그릇과 찻잔을 보고 냉큼 집어서 카트에 담았다. 영국산 본차이나와 일본산 자기는 오랫동안 내가 탐내는 용기들이다. 여자 나이 60이되면 부엌용품은 사지 않는다지만 나는 그것보다 훨씬 나이 들어도 여전히 부엌용품을 산다. 그리고 더 멋진 것을 찾느라 여기저기 열심히 살피다 몇가지 더 골랐다. 막상 체크아웃 카운터로 가는 길에 잠시 멈춰서 카트에 있는 물건들을 살펴보다 아차 싶었다. 하나같이 현재의 나에게는 전혀 필요 없는 물건들이었다.
내 눈에 띄어서, 모양과 색깔이 특이해서 고른 물건들은 사실 딸들이나 누구에게 주고 싶은 것들도 아니었다. 잠시 숨을 고르고 되돌아가서 물건들을 하나하나 제자리에 되돌려 놓고 가게를 나왔다. 1시간 반의 수고후에 빈손으로 가게를 나섰지만 내 마음은 홀가분했다. 그리고 오래전 공군에 입대해서 첫 발령지에서 받은 재정강의를 떠올렸다.
공군의 재정교육은 고정적인 수입이 생긴 젊은 신병들에게 낭비를 막고 지혜로운 돈 관리법을 가르치려는 취지였다. 그 당시 돈에 대한 관념도 희박하고 더구나 재정에 문외한인 나에게는 그 교육이 평생 지침이 됐다. 그때 강사는 무엇에 돈을 쓰기 전에 그것이 A, B, C 중 어디에 속하는지 생각해보고 현명한 결정을 하라고 했다. A는 생존에 절대로 필요한 것, 의식주 등이고, B는 생존에 있으면 좋고 없어도 무관한, 좋은 자동차나 스테레오 같은 것들, C는 생존에는 전혀 필요 없지만 자아, 자존심을 만족시켜주는 보석 같은 사치품으로 분류했다. 보태서 수입의 10%는 미래를 위해 투자하라고 권고했었다.
그후부터 나는 이 레슨을 착실히 실천하고 또한 내 아이들에게도 가르쳤다. 아직도 가끔 비싼 물건을 살까 말까 주춤하는 딸에게 ABC를 들먹이면 딸은 슬그머니 물러선다. 그런데 근래 나에게는 이 ABC가 손주 세 녀석들로 바뀌었다. 어머니에서 할머니로 승진한 탓이다. 책이나 장난감 등 무엇인가 보면 아이들이 좋아할까? 싫어할까? 에 포커스를 맞춘다. 그리고 내 시선을 아이들의 성향에 조절해서 필요성이나 가격은 고려하지 않고 아이가 좋아할 것 같으면 무조건 산다.
최근에 4살된 손주가 와서 함께 8일을 보냈다. 전인교육이나 훈육보다 무조건 아이가 좋아하는 일 함께 하고 먹는 것도 아이가 먹고 싶다 하는 것을 줬다. 엄격하게
규칙적인 생활을 지키는 부모의 룰에서 해방된 아이가 자유롭게 놀도록 돌봤다. 부산스럽게 늘 무엇인가 하는 나처럼 어린 손주도 끊임없이 놀이감을 고안해서 떠들썩한 웃음거리를 만들었다. 아이와 보낸 날들은 모두가 행복했던 추억이 됐다.
이제 버지니아주에 사는 큰손주가 1학년을 마치고 이번주에 여름방학을 맞는다. 지난달에 7살이 된 아이에게 나는 생일카드를 7장 보냈다. 매 카드마다 간략한 시 구절이나 질문을 적고 북마크를 끼워서 보냈다. 며칠에 걸려서 카드 7장을 받았다며 신이 난 아이는 감사하다며 환하게 웃었다. 그리고 앞으로 책 많이 읽겠다고 했다. 내 메시지가 제대로 전달되었다. 올 여름 이 아이가 앨라배마에서 여름방학을 보내는 동안 나는 가능한한 한국어로 대화하고 또한 용돈을 벌게 하려고 한다. 아이가 번 돈을 현명하게 관리하는 방법을 재밌게 가르치려고 궁리하며 ABC 재정교육을 확실히 시키려고 벼르는 나는 구수한 할머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