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6년 2월 11일, 차가운 기운이 감도는 이른 새벽. 가마 두 채가 황급히 경복궁을 빠져 나간다. 가마가 도착한 곳은 정동에 있는 러시아 공사관이었다. 이윽고 가마에서 낯선 두 사내가 내린다. 고종과 세자인 순종이다. 왕과 세자가 궁녀의 가마를 타고 몰래 궁궐을 빠져 나와 외국 공관으로 거처를 옮긴 것이다. 이른바 아관파천이다. 설날을 앞두고 장안은 온통 혼란의 도가니에 빠졌다. 이범진·이완용 등이 러시아 공사관에서 고종을 싸고돌며 새로운 내각을 탄생시켰다. 개화정권이라고 불리고 친일내각으로도 불리는 김홍집 내각은 붕괴되었다. 이날 새벽, 정동에 있는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한 고종은 친일내각의 대신들을 체포해 죽이라는 칙령을 내렸다.
이날은 조선에 부끄러운 날이다. 한 나라의 국왕이 목숨이 어떻게 될까 두려워서 다른 나라 공사관에 몸을 피하는 판에 그 나라가 어찌 독립국으로 인정받으며, 어찌 그를 왕이라 부를 수 있었겠는가. 그런 왕이 러시아 공사관에 도착하자마자 총리대신 김홍집은 정병하·유길준 등과 함께 경복궁 앞으로 달려갔다. 이미 친러 정권의 무서운 명령이 내려진 후였다. 어제까지 자신의 내각이었던 김홍집 내각의 대소신료들을 범죄인으로 규정하며 무조건 죽이라는 것이었다.
벌써 관리들은 경복궁 앞에 순검들을 배치해 놓았고, 보부상 수천 명을 동원해 삼엄한 경계를 펴고 있었다. 광화문 앞에 있는 일본 수비대에는 일본 군인들이 총검을 날카롭게 세우고 서 있었다. 군부대신 조희연이 군대를 동원하려고 발버둥 쳤지만 허사였다. 되레 그는 자신을 체포하려고 돌격해오는 순검들을 피해 달아났고, 일본군 수비대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다. 군부대신이 이 지경이니 다른 대신들의 처지는 말할 것이 없었다. 총리대신 김홍집은 ‘전하가 러시아 공사관으로 옮기셨다‘는 말을 들은 순간부터 자신의 최후를 직감했다.
그가 내각의 수반을 맡은 것은 이번이 네 번째였다. 박영효에 의해 ‘일본 공사에 굴종하는 줏대 없는 소인배’라고 욕을 먹을 정도였던 그는 일본의 뜻대로 개혁을 실시했고, 일부 일본 공사관원들을 정치에 끌어들이기도 했다. 하지만, 19세기 말 제국주의의 거친 격랑 속에서 조선의 관료로서 그만한 경륜을 가진 이도 드물었다 일찌기 청나라 외교관 황준셴의 〈조선책략〉을 소개한 인물이었고, 외국과의 외교관계와 사건 사고의 수습에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여 ‘비 오는 날의 나막신’이라는 별명으로 불리웠던 이였다.
조선 국정에 비판적인 매천 황현 조차 “나랏일에 마음을 다했고, 재간과 지략은 속류배가 따를 바가 못 되었다”고 할 정도였다. 김홍집은 광화문에 이르러 성난 군중에게 둘러싸였다. 이때 일본 군인들이 달려와 김홍집에게 일본 수비대로 피신하라고 권고했다. 김홍집은 의연했다. “먼저 전하를 뵙고 말씀 드린 후 어심을 돌리지 못하면 일사보국(一死報國)하는 수밖에 없다.” 길을 헤치며 나서는 그를 일본측이 가로막고 계속 피신을 권하자 그는 호통을 친다. “나는 조선의 총리대신이다. 조선인에게 죽는 것은 떳떳한 하늘의 천명이지만,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 구출된다는 것은 짐승과도 같도다.” 그리고 그는 그를 죽이라는 어명에 살기를 띤 백성들 앞으로 나아간다.
“어명이다. 김홍집을 무조건 죽여라!” 경무청 순검들이 그를 차서 쓰러뜨리자마자 일제히 난도질하여 가슴과 등을 내리쳤다. 시체의 다리 부분을 거친 새끼줄로 묶어 종로로 끌고 와 시신을 드러내놓게 하고는 거기에다 ‘대역무도 김홍집’이라 크게 쓴 장지를 붙였다. 그러자 길에 가득 차 있던 보부상들이 시체를 향해 돌을 던지기도 하고 발로 짓이겨 시체에 온전한 곳이 한 군데도 없도록 만들었다.
군중은 총리대신을 난자하는 것도 모자라 시신의 다리에 새끼줄을 비끄러매고 종로 바닥을 쓸고 다니다가 다시 몽둥이로 때리고 발로 짓이기고 돌로 찍어 형상을 알아볼 수 없게 만들었다. 당시 그의 나이 54세였다. 이후 왕은 무슨 일을 들이밀어도 척척 해내는 ‘비 오는 날의 나막신’을 다시 신어보지 못했고, 백성들은 그렇게 죽음 앞에서 책임감을 발휘하는 총리대신을 그 후로 만나지 못했다. 김홍집의 가족 또한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한성부 사저에 있던 부인은 연좌되어 관비로 끌려갈 것을 예상하고 아들을 죽이고 자살했다.
황현의 〈매천야록〉은 “그가 이때 죽은 것은 그 개인으로서는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일지도 모른다. 그에게는 늘 일본에 이용 당했다는 비난이 쏟아졌을망정 뒷날 변절한 개화파의 오명에서는 벗어났기 때문이다”라고 기록하고 있어 김홍집의 마음을 대변해 주고 있는 것 같다. 어찌 보면 망명으로 목숨을 부지하기보다 자기 정권이 범한 과오를 죽음으로 속죄한 그는 우리 역사 속에서 찾아보기 힘든 책임 있는 정치가였다. 나라를 다시 일으키겠다는 갸륵한 동기로 개혁을 이끌다 실패에 책임을 지고 의연하게 죽음을 택한 그의 삶은 오늘 우리 정치인들의 들메끈을 고쳐 매게 한다.
조선의 마지막 영의정이자 초대 총리대신 김홍집은 망국을 향해 치닫던 조선 말기와 대한제국 시기 최선을 다해 재상의 역할을 수행했다. 때로는 명성황후 시해의 주범 중 하나로 몰리기도 했고 ‘친일매국 대신’으로 몰려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최근 그의 역할에 대해 새로운 평가가 나오고 있다. 김홍집이 활동하던 조선은 무능한 군주, 이리저리 잘도 넘어가는 무지한 백성들, 이권과 축재에 여념이 없었던 부패한 탐관오리들, 경복궁을 점령하고 있는 일본군을 앞에 놓고 총리대신이 된 그에게 선택의 여지란 없었다. 그는 사그러드는 국운을 안고 ‘할 일’하다가 비명에 갔다.
우리는 망국의 역사를 가진 민족이다. 싸움 한번 못해 보고 내부분열로 나라를 빼앗겼다. 그러고도 우리 힘으로 나라를 찾지도 못했다. 연합군의 승리에 의해 되찾은 나라. 그러고도 하나가 아니라 둘로 쪼개진 상태다. 우리는 망국 조선의 길과는 다른 길을 가고 있는가? 성공에 취할 때가 아니다. 오히려 망국의 역사를 가슴에 담아야 할 때다. 변화하는 세상에 길을 잃은 국가. 다시 망하고 싶지 않으면 그 망국의 역사를 가슴에 담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