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와 호수가 가까운 뉴올리언스 여름은 참으로 뜨겁고 눅눅하다. 그러나 이러한 더위에도 불구하고 많은 관광객이 끊임없이 찾아온다. 재즈, 다양한 나라의 음식, 다채로운 지역 행사를 찾는 관광객의 호기심과 더불어 도시는 열기로 가득하다.
6월23일, 주일도 여느 날처럼 후텁지근했다. 올해 74주년을 맞은 한국전쟁 기념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나의 교회는 분주했다. 행사 참석자들에게 비빔밥, 샐러드와 미역 냉국을 제공하기 위해서다. 우리는 다행히 행사에 늦지 않게 뉴올리언스 웨스트 뱅크에 있는 재향군인회관에 도착했다. 실내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참석자가 270여 명이나 되었다고 나중에 한 관계자로부터 전해 들었다. 우리는 가장자리에 남아 있는 빈테이블을 차지하고 앉아 숨을 골랐다.
곧이어 한 여인이 낭랑하고 당찬 목소리로 행사의 시작을 알렸다. 나의 이웃은 그가 지역 방송 WDSU의 앵커라고 알려주었다. 그제야 순서지를 보니 행사 진행자 라스트 네임, Kim이 보였다. 36만여 명 인구 중에 한인이 0.1% 뿐인 도시에서 지역 인사로 자리잡은 인물이라니 다시 바라보게 되었다.
마침 그날 행사의 주최자도 여성이었다. 루이지애나 한국전 참전용사 후원회의 김선화 회장이다. 한국전쟁에 참전했다가 사망한 군인 가운데 루이지애나 출신이 589명으로 유독 많았다고 한다. 김선화 회장은 루이지애나 한국전 참전 용사의 희생을 기억하고, 재향군인과 가족이 서로 소통할 수 있는 연결 고리가 되고자 하는 모임을 만들었다. 김선화 회장은 16년 동안 사비로 한국전쟁 기념행사를 주최하고 있단다.
기도, 초청 연사의 연설이 이어지는 동안 주변을 슬쩍 돌아보았다. 연세가 많아 보이시는 분들은 분명 참전 군인이었다. 휠체어나 보행 보조 기구를 이용하는 분들도 참전 군인이란 걸 알아채기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순서지에는 이미 돌아가신 분들의 이름이 더 많이 기록되어 있었다. 올해 뵈었던 분을 내년에는 뵐 수 없는 안타까운 일들을 겪으며 이 행사가 해를 거듭하고 있구나 싶었다.
나는 이번 행사가 열린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을 때부터 작은 질문이 있었다. 단순히 전쟁을 기념하고 참전용사를 추모하는 행사인가? 아니면 이 행사를 통해 무엇을 들려주고 싶은 건가? 맘 속에 평화라는 두 글자가 오롯이 떠올라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다음 차례는 뉴올리언스 한국학교 아이들의 공연이었다. 이번 공연을 위해 아이들이 연습을 많이 한 걸로 알고 있다. 아이들의 장고 춤이 시작되었다. 춤의 배경 음악이 부드럽게 깔리고 익숙한 멜로디가 들려왔다. 찬송가 ‘내 영혼이 깊은 데서’였다. 장고 춤을 찬송가에 맞추어 추다니 아주 뜻밖이었다. 어깨가 리듬을 타면서 후렴 ‘평화 평화로다 하늘 위에서 내려오네’를 지날 때였다. 내가 가졌던 질문의 실마리가 반짝거렸다.
한국학교의 두 번째 공연은 검무였다. 아이들의 박력 있는 춤사위가 기특해 보였다. 관람자들의 흥미로운 표정들 사이로 아이들을 지도한 선생님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선생님은 아이들을 향하여 앉아서 춤을 같이 추고 있었다. 선생님의 춤은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학생들을 위한 것이리라. 그런데 나는 공연이 끝날 때까지 그 선생님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아이들에게 미안해서 아이들을 살짝 바라보았다가 다시 선생님을 찾았다. 그 이유는 그의 흐트러짐이 없는 열정적인 춤사위 때문이었다. 멋있었다.
마지막으로 김선화 회장은 행사에 참여한 참전용사를 한 분씩 호명했다. 그는 이웃집 사람을 소개하듯 결혼 몇 주년이 되었는지도 알려주었고 사람들은 박수로 축하했다. 돌아가신 분은 그 가족이 호명되기도 했다. 꽃과 선물도 전달하며 훈훈한 시간을 보냈다. 기념 행사를 마치며 평화는 마음에서 오는 거구나, 라는 생각에 이르렀다. 두려움이나 불안이 증폭되면 전쟁이 일어나고 희생이나 사랑이 더 커지면 평화로운 세상이 된다. 우리는 각자의 방식이든 혹은 연대가 필요한 일에는 서로 협력하면서 평화를 만들어 가고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김선화 회장이 한국전쟁을 기념하고 참전용사의 희생을 기억하는 방식, 한국학교 선생님이 가진 예술적 재능으로 세상을 아름답게 하는 일, 신앙인이 영성과 실천을 깊고 넓게 하려는 애씀이 모두 평화를 이루는 길이다. 뉴올리언스의 평화의 온도는 도시 열기만큼이나 높은 편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