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을 위해 죽으라고 하면 죽을 아이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믿을 수가 없습니다.”
미 정부에 신고하지 않고 한국 정부를 위해 일한 혐의로 기소된 수미 테리(52) 미국외교협회(CFR) 선임연구원의 모친 이은애씨는 17일 중앙일보와의 전화 인터뷰에서 “제 딸은 그럴 애가 아니다”며 이같이 말했다. 앞서 테리 연구원을 기소한 연방 검찰은 공소장에서 그가 10여 년간 미국 주재 한국 공관에서 근무하는 국가정보원 요원들로부터 고가의 가방과 의류, 현금 등을 받은 대가로 미국의 비공개 정보 등을 넘겨온 혐의를 받고 있다고 밝혔다.
이씨는 전화 통화에서 가늘게 떨린 목소리로 “미국을 위해 헌신하듯 일했던 아이다. 너무나 억울한 일”이라고 여러 차례 말했다. 1972년생인 수미 테리 연구원이 12살 되던 해 함께 미국으로 이민 간 모친 이씨는 현재 버지니아주에 거주하고 있다.
이씨는 “제 딸을 너무나 잘 아는데 CIA(중앙정보국)에 들어간 뒤 딸을 보고는 ‘미국을 위해 죽으라면 죽을 수 있겠구나’ 이런 느낌이 들 정도로 미국에 대한 애국심이 강했다”며 “한국을 위해서도 마찬가지다. 말 그대로 ‘코리안-아메리칸’(한국계 미국인)”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미국을 위해 정부기관에서 성실하게 일했고 한ㆍ미 동맹 강화를 위해 양국을 오가며 부지런히 일한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했는데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모르겠다”고 덧붙였다. 이씨는 언론 보도 등을 통해 나온 테리 연구원의 혐의와 관련해 “이미 오래된 몇 년 전 일이라고 하는데 왜 갑자기 문제가 되는지 이해가 안 된다”고도 했다.
테리 연구원은 2008~2009년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보좌관 근무 시절 일에 파묻혀 지내곤 했다고 한다. 이씨는 “항상 일이 많아 점심 먹으러 나갔다 들어오는 시간도 아쉬워 도시락을 싸갖고 다녔던 아이”라고 했다. 이씨는 “수미가 어렸을 때부터 내가 해온 얘기는 ‘가령 김씨가 이씨 집에 시집을 가면 시가에 헌신해야 한다. 친정 얘기가 나오기 전까지 시가에 죽을 각오로 잘하라’는 것”이라고 했다. 한국인이 미국에 이민 왔으면 미국에 먼저 최선을 다해야 하며 그것이 결국 한국을 빛나게 만든다는 얘기라고 했다.
미 CIA 분석국에서 2001년부터 2008년까지 일했던 테리 연구원은 평소 결벽증 수준으로 입이 무거웠다는 게 이씨는 전했다. 그는 “딸이 미국 정부기관에서 일하면서부터는 입을 딱 다물고 살았다”며 “딸이 ‘혹시 잠꼬대로라도 한 얘기가 있으면 어떤 일이 있어도 밖에 하지 말아 달라’는 말을 여러 차례 당부했다”고 떠올렸다.
이어 “수미는 나에게 미 국가 기관에서 일하는 것에 대해 묻지도 말라고 했다”며 “수미는 제게 ‘딸이 세계 최강대국 미국을 위해 어딘가 한 구석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다는 프라이드(자부심)만 갖고 있으면 된다’고 말한 적도 있다”고 전했다.
지난 1월 4일 뉴욕에서 열린 코리아소사이어티 주최 다큐멘터리 ‘비욘드 유토피아’ 상영회에서 공동 제작자인 수미 테리(왼쪽 세 번째) 미국외교협회(CFR) 선임연구원이 발언하고 있다. 연합뉴스
테리 연구원이 다큐멘터리 영화 ‘비욘드 유토피아’ 제작을 5년 전부터 준비해 왔지만 이 얘기도 안 해줘 꿈에도 몰랐다는 이씨는 영화가 공개되고 나서야 이 사실을 알았다고 한다. 테리 연구원이 제작자로 참여한 ‘비욘드 유토피아’는 지상낙원으로 믿고 자란 북한 땅을 탈출하려는 사람들의 목숨을 건 여정을 담은 작품으로 2023 선댄스영화제 관객상, 2023 시드니영화제 최우수 국제 다큐멘터리 관객상 등을 수상했으며 이날 발표된 에미상 다큐멘터리 영화제작 부문 후보에 올랐다.
이씨는 “미주 지역 한인 사회에서 ‘너무 열심히 일하다 보면 뜻하지 않은 일에 연루돼 시련을 겪기도 한다. 걱정하지 마시라’는 위로의 문자메시지를 보내주고 있어 힘이 된다”고 말했다. 이씨는 미국 정부나 한국 정부에 하고 싶은 말이 있느냐는 물음에 “지금은 아니다. 침묵을 지키겠다”고만 했다.
외국대리인등록법(FARA)에 따른 신고를 누락한 채 사실상 한국 측 정보원으로 활동한 혐의로 전날 미 사법 당국에 체포된 테리 연구원은 보석금 50만 달러(약 6억9000만 원)를 내고 당일 풀려났다. 이씨는 “사위에게서 ‘걱정하지 마시라. 그(테리 연구원)는 잘 있다’는 문자메시지를 받았다”고 전했다.
밀워키=김형구 특파원 kim.hyounggu@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