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책으로 인생배우기 30.
몽고메리에 살면서 마트에서 많이 구입했던 채소 중 하나는 오크라다. 오크라는 아열대 채소로 여자 손가락 모양과 비슷하다 하여 레이디핑거라고도 불린다. 모양만 본다면, 한국 풋고추랑 닮아서 매운맛이 날 것 같지만 끈적끈적하고 순한 맛이 마처럼 느껴진다. 나는 오크라로 장아찌를 만들어 먹었다.
어느 날, 옆집 할머니께 인사를 드리려 오크라 장아찌 한 병을 들고 갔다. 마트에서 파는 새콤달콤한 피클이 아니라, 한국의 진간장을 넣어 만든 달콤 짭조름한 내 장아찌를 드신 할머니는 맛이 강하지 않아서 좋다고 하셨다. 그러시면서 오크라 튀김을 먹었던 어린 시절 이야기를 짧게 들려주셨다.
나의 짧은 영어실력으로 할머니의 이야기를 정확하게 다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어릴 때 집안일을 도와주던 흑인 아줌마가 자주 해주던 음식이 오크라 튀김이라고 했다. 나이 들어서 어릴 때 먹었던 음식이 그리운데, 엄마가 해 준 음식이 아니라 그 흑인 아줌마가 해준 음식이라고 했다.
앨라배마주 백인 가정에서 태어나 자란 작가, 데버러 와일즈의 그림책 〈Freedom Summer〉는 작가가 경험한 1964년 여름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이때는 옆집 할머니가 오크라 튀김을 먹으며 자랐을 시절이고, 할머니와 비슷한 어린 시절을 보내고 있는 흑인 아이 존 헨리와 백인 아이 조의 이야기이다. 존 헨리는 조의 집에서 가정부로 일하는 애니 아줌마의 아들이다.
여름이면 존 헨리는 엄마를 따라와서, 조의 집에서 엄마의 일을 돕기도 하고 조와 함께 장난치고 놀며 서로 좋은 친구가 되었다. 더위에 지치면 두 아이는 냇가에 가서 수영을 한다. 존 헨리는 수영을 아주 잘하지만 마을 수영장에는 갈 수 없다. 피부색이 다른 흑인은 공공 수영장을 이용할 수 없다는 법이 있기 때문이다.
‘1960년대에 흑인들은 어디를 가든 뒷문을 이용해야 했고, 식당에서는 백인들이 주문을 끝낸 뒤에야 주문을 할 수 있었으며 화장실과 수돗물도 같이 사용할 수 없었다.’ 이렇게 차별이 법으로 보장되는 곳에서 백인이 드러내 놓고 흑인 친구를 사귀는 것도 아주 위험한 일이었을 텐데….
어느 날 저녁, 부모님으로부터 피부색에 상관없이 누구나 다 마을 수영장에 들어갈 수 있는, 새로운 법이 만들어졌다는 이야기를 듣고 조는 기뻐서 내일 존 헨리와 함께 마을 수영장에 가기로 한다. 마을 수영장에 꼭 가고 싶었던 존 헨리는 이튿날, 해가 뜨자마자 조에게 달려오고 두 아이는 수영장을 향해 힘차게 달려갔다.
하지만 깨끗한 물로 가득했던 수영장을 인부들이 뜨거운 아스팔트로 채워 넣고 있는 것을 본다. 두 아이는 차마 발이 떨어지지 않아 끈적끈적한 아스팔트가 수영장을 가득 채우는 걸 지켜보며 울먹인다. “백인들은 흑인들이랑 수영하는 게 싫은 거야.”라고 말하는 존 헨리를 위로하고 싶은 조는 함께 아이스크림 가게에 들어가, 나란히 앉아 아이스크림을 먹자고 한다. 언제나 문 앞에서 조가 아이스크림을 사오길 기다려야만 했던 존 헨리가 함께 어깨동무를 하고 아이스크림 가게 앞문으로 걸어간다.
‘모든 인간은 인종, 피부색, 종교, 국적에 상관없이 공공시설을 평등하게 즐길 권리가 있다.’는 공민권법은 1950년대에서 1960년대에 미국에서 제정된 흑인 인종차별 금지 법률을 통틀어 이른다. 앨라배마주 몽고메리에서 버스 보이콧 운동이 있고 십여 년이 흐른 1964년, 그리고 그 후도 오랫동안 평등을 위한 운동은 계속되었고, 차라리 수영장을 아스팔트로 채우고 마는 차별 또한 계속되었다.
현대 민주주의의 기틀이 된 프랑스 혁명의 기본정신은 자유, 평등, 박애이다. 자유는 자본주의에 가깝고, 평등은 사회주의에 가까워 서로 상충되는 개념이기도 하다. 자유와 평등을 연결하는 개념이 모든 사람을 평등하게 사랑하자는 박애이다. 개인의 자유와 평등을 보호할 강한 법이 아무리 있다 해도, 인간을 사랑하는 기본적인 마음, 박애가 없다면 평등은 실현되지 못한다.
흑인과 백인, 두 아이가 어깨동무를 하고 아이스크림 가게에 들어갔을 때 과연 가게 주인은 아이스크림을 내어 주었을까? 그림책이 열어놓은 질문에 대답하지 못한 채 책을 덮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