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 1세대와 자녀간 뒤바뀐 역할 조명
“경계 흐려져 어린 나이에 부모 역할…
과도한 헌신·복종은 정신적 불안 수반”
“저는 캐나다 이민 한인 2세입니다. 전형적인 이민 가정 자녀답게 저는 어릴 때부터 통역을 돕고, 식료품을 사고, 각종 청구서를 지불했습니다. 부모님은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 정착하셨지만 저는 아직 어린 소녀처럼 그들의 애착과 기대를 받고 있습니다.”
“타주에 사시는 아버지는 종종 아프실 때마다 병문안을 가지 않는 저를 비난하십니다. 제 가정에 충실하다는 이유로 저는 이기적인 나쁜 아들이 됩니다.”
지난 20일 애틀랜타 중앙교회에서 한인 이민가정에 초점을 맞춘 부모교육 세미나가 열렸다. 아시아태평양계(AAPI) 정신건강 증진 비영리단체인 P.E.A.C.E.(이하 피스)가 지난 2월 출범 이후 처음 연 강연회 주제는 “‘NO’의 힘, 부모 자녀간 건강한 경계 설정하기”다. 피스는 조지아주 내 한인 정신건강 문제를 다루는 최초의 단체로 정신과 전문의, 사회복지사, 대학교수 등 다양한 전문가들이 모여 설립했다.
연사로 나선 데이빗 김(한국명 김대수) 피스 대표는 먼저 이민 1세대 부모와 2세대 자녀간 갈등은 언어 장벽, 본국과 이민국간 문화 차이, 세대 차이 등 다양한 사회적 요인의 영향을 받는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민을 선택한 부모의 결정은 각 가정마다 너무나 특수한 배경을 갖고 있어 2세대 자녀는 이를 직접 경험하거나 이해하기 어렵다. 하지만 이민 트라우마를 겪는 부모가 복잡한 이야기를 아이들에게 터놓고 의지하면서 아이들의 ‘부모화(Parentification)’가 발생한다”고 지적했다. 부모화 현상은 자녀가 오히려 부모를 보살피면서 부모-자녀간 서로 역할이 뒤바뀌는 상황을 발한다. 이 경우 자녀는 책임의식이 높아지며 대인관계에서 타인을 과도하게 보살피는 경향을 보인다. 자신의 욕구와 감정을 누르고 타인 돌봄을 우선시하다 보니 상시적 죄의식과 불안을 겪을 수 있다.
킴벌리 왕 심리상담사가 성장단계별 양육법을 설명하고 있다.
심리상담시 이민 가정에서 가장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문제가 부모화로 인한 인한 경계 붕괴다. “아니오”, “싫다”라고 말한 뒤 겪는 죄책감으로 인한 불편과 스트레스를 회피하기 위해 본인이 가진 정서적 한계 너머까지 부모에게 헌신하는 자녀가 있는가하면, 자녀에게 과하게 의존하며 사랑의 증거로 복종을 요구하는 부모가 생겨나는 것이다. 김 대표는 “자녀가 부모에게 말대꾸하는 것은 당신을 덜 사랑한다는 뜻이 아니다. 모든 문제에는 (부모, 자녀) 두 가지 관점이 있다”고 강조했다. 함께 강연을 진행한 킴벌리 왕 심리상담사 역시 “‘아니오’라고 말하는 것은 내 한계를 알리는 것”이라며 “거절 의사를 존중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부모가 거절을 위한 어휘를 풍부하게 사용해야 한다는 조언도 있었다. 김대표는 “대부분 부모, 특히 남성은 화가 났다는 감정만 전달하는 경우가 있다”며 “전통적으로 부모에게 허용되지 않았던 슬픔, 두려움, 상처 등의 어휘를 적극적으로 사용해야 거절의 이유를 정확히 제시할 수 있고 또 자녀가 본인의 감정을 탐구하는 데 도움을 받을 수 있다”고 전했다. 자녀가 스스로의 한계에 대해 가장 적극적으로 탐구하는 10대 시기에 감정에 대한 대화를 자주 나누면 정체성 확립에 큰 도움이 된다. 왕 상담사는 “10대들은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데 적극적”이라며 “각자의 경계가 어디까지인지에 대한 대화에 초대하기 좋은 시기”라고 말했다.
김 대표는 “아시아계가 겪는 불안과 우울의 원인은 대개 자신의 경계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데서 온다”며 “가정상담의 가장 중요한 측면을 첫 주제로 선정했다”고 밝혔다. 피스는 오는 12월 다음 아시아계 부모 교육을 열 계획이다. 자세한 내용와 일정은 홈페이지(aapi-peace.org)를 참고하면 된다.
장채원 기자 jang.chaewon@korea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