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여간해서는 권력자를 믿지 않는다. 배신과 위선은 권력의 속성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권력자의 비위 의혹이 나오면 일단은 의심의 눈길로 본다. 충분한 증거 없이는 그들의 해명을 신뢰하지 않는다. 배신의 사전적 의미는 ‘믿음과 의리를 저버리고 돌아섬’이다. 분명히 배신의 저변에는 믿음이 존재한다. 인류 최초의 배신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한 아담과 하와일 것이며, 가인으로 이어지고, 기원후 가장 큰 배신자는 유다로 낙인찍힌다. “브루투스 너마저!’’라는 비통한 말을 남긴 카이사르 또한 배반을 인정하며 눈을 감았다.
그렇다면 인간은 왜 나 아니면 안 되고 나만의 행복을 위해 거침없이 등 뒤에서 칼을 꽂는 것일까. 그것은 바로 이기심에서 출발하는 것임을 우리는 경험으로 알고 있다. 우리는 누구나 크든 작든 배신을 하면서 살아간다. 마음 한편에는 나를 믿어준 사람에 대한 미안한 마음이 자리잡고 있지만, 우리는 알고 있다. 누군가와 협력하면 두 사람 모두에게 이득이 되지만, 배신하면 그의 이득까지 내 몫이 된다는 걸. 이처럼 이기심이란 인간을 생존하게 하는 원동력이며 또한 타락하게 하는 마력을 지니고 있다.
로마제국의 청사진을 마련한 카이사르는 절대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 .카이사르는 최고 권력자가 되고 나서 5년 동안 쉬지 않고 빠른 속도로 정치, 경제, 사회 등 각 분야에서 개혁을 단행했다. 그는 마치 최고 권력자의 임기가 5년 단임제인 것처럼 개혁을 추진했다. 급진적인 개혁은 변화를 원하지 않는 원로원파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숨 가쁘게 몰아치는 개혁의 광풍과 함께 카이사르에게 주어진 특권은 점점 늘어만 갔다. 가장 큰 특권은 독재관이다. 기원전 49년에 독재관직이 주어졌고, 기원전 46년에 10년 임기의 독재관, 기원전 44년 1월에 종신 독재관이 되었다. 호민관에게만 인정되는 거부권과 신성불가침권의 권리도 받았다. 개선장군에게만 일시적으로 부여되는 ‘임페라토르 ’칭호를 언제나 사용할 수 있는 권리, 개선장군이 입는 자줏빛 망토를 평소에도 입을 권리, 평소에도 월계관을 쓸 수 있는 권리, 달력에 카이사르가 태어난 달을 기념하여 명칭을 율리우스(July)로 바꾸는 권리 등이 파격적으로 주어졌다. 카이사르가 가진 중요한 특권들을 보면 이미 황제의 위치에 오른 것이나 다름없었다. 사실상 제정이 시작된 셈이다.
기원전 44년 3월 15일, 드디어 운명의 날이 밝았다. 원로원 회의는 평소와 마찬가지로 오전 10시 폼페이우스 회랑에서 시작되었다. 카이사르가 회의장으로 가고 있을 때 한 점술가가 가로막고 “카이사르여, 3월 보름을 조심하시오!” 라고 경고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의 말을 무시하고 걸어갔다. 무기를 가지고 원로원 회의장에 들어가는 것은 금지되어 있었다. 사실 경호도 무방비 상태였다. 독재관은 24명의 수행원이 같이 행동하지만, 무기를 든 경호원은 아니었다. 더욱이 회의 중에는 가까이 갈 수 없고 멀리 떨어져서 대기하고 있었다. 암살자들은 회의가 시작되기 직전에 거사를 실행에 옮겼다. 암살 음모에 60명이 넘는 원로원 의원들이 가담했다고 한다. 이들은 카이사르를 마구 찔러 무려 23군데나 상처를 입혔다. 카이사르는 자신이 총애했던 브루투스를 보자 “브루투스, 너마저!”라고 외치면서 숨을 거두었다.
브루투스는 카이사르의 측근이었다. 그의 어머니 세르빌리아는 카이사르와 연인관계였으므로, 카이사르에게는 아들 같은 존재였다. 그러나 그는 카이사르에게 반대하여 로마의 가치체계를 보전하는 것이 애국이라고 생각했다. 카시우스는 가짜 편지로 분노를 부추겼다. “브루투스여, 그대는 잠자고 있는가?”니체는 브루투스의 암살 가담을 ‘권력에 대한 의지’라고 평가했다. 이는 브루투스가 자신의 이상을 주장하고, 로마 정치권내에서 권력을 얻고자 한 욕망이라는 것이다. 카이사르가 죽고난 후 유언장이 공개되자, 분노한 시민들은 배신자들을 향해 횃불을 들었다. 암살 주도자와 그의 가족들은 추방과 박해를 당하거나 일부는 처형되었다. 브루투스와 카시우스는 기원전 42년 카이사르의 후계자였던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에게 저항하다가 필리피전투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후, 로마는 브루투스가 목숨을 걸고 지키고자 했던 공화정이 막을 내리고 로마제국이 들어섰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로마의 공화정 말기 시대와 다르지 않다. 양극화와 불평등으로 인한 사회적 분열은 서로 다른 문화적 이데올로기, 사회 경제적 격차 속에서 불신의 씨앗은 분노를 낳고, 사회적 결속력을 약화시킬 뿐 아니라 서로 다른 이념이 국가의 기반을 흔들고 있다. 포퓰리즘 대결 구도는 너무나 스펙타클해서 배신의 연속이다. 배신은 악덕이지만, 무작정 배신을 비난하면서 배신자에게 저주를 퍼부을 수는 없다는 데에 인간 세계의 딜레마가 있다. 공적(公的) 영역과 사적(私的) 영역의 차이 때문이다. 우리 인간은 사회생활을 하는 한 공적 관계와 사적 관계라고 하는 두 종류의 관계를 동시에 맺으면서 살아가야 한다. 사적으론 큰 신세를 진 사람에게 공적으론 반대하거나 비판을 해야 하는 일이 생길 수 있다. 이럴 때 어찌 해야 하는가?
요즘 대한민국의 정치판을 뜨겁게 달구고 있는 한 정치인의 ‘배신 공방’을 보며 ‘내 그럴 줄 알았어’ 하는 생각을 떨칠 수 없다. 일찍이 쇼펜하우어는 말했다. ‘인간은 배신하는 존재’라고. 잘 해주면 인간은 두 가지다. 고마워하는 사람, 이용해먹는 사람…이 배신의 시대에 결코 배신하지 않는 것, 그것은 때 맞추어 동토를 헤집고 올라온 새싹과 봄을 환호하는 개나리 진달래밖에 없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