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인 DACA 수혜자·서류미비자 청년들 이야기 들어보니
“서류미비자요? 한인 중에도 많나요?”
뉴욕 일원 한인 10명 중 1명은 서류미비자로 파악되지만, 정작 한인 커뮤니티에선 본인들의 이야기는 아니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일부 한인들의 경우, “강경 보수 이민정책도 한인들에겐 큰 영향이 없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다. 특히 청년층의 경우, 어린 시절부터 미국에서 살아왔지만 ‘한국인도, 미국인도 아닌’ 느낌을 받는 경우가 많다고 입을 모은다. 불법체류 청년 추방유예(DACA) 프로그램 수혜자, 서류미비자 한인들을 만나 그들의 경험을 들어봤다.
◆“한국에 계신 아버지 장례에도 참석 못 했다”=2004년, 10살이 되던 해에 어머니, 누나와 미국으로 온 한인 남성 이모(30) 씨. DACA 프로그램이 처음 발표됐을 때만 해도 그는 반신반의했다. 이 씨는 “서류미비자 정보만 빼낸 뒤 추방하는 것 아니냐는 걱정이 있었지만 신청했다”고 말했다. DACA 수혜자로서 직업을 찾긴 수월해졌지만, 여행의 자유는 남의 얘기였다. 2014년, 한국에 남아 계시던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도 여행허가(Advance Parole)는 신청하지 못했다. 여행허가를 받아도 다시 미국으로 돌아오는 것을 확신할 수 없어서다. 한국을 방문할 경우, 한국인으로서 피할 수 없는 병역 문제도 또 다른 문제였다.
◆“‘내 나라’인 미국 떠나는 고민 늘 따라다녀”=15살에 어머니, 남동생과 함께 이민온 차모(35) 씨. 그의 어머니는 당초 투자비자로 정착할 생각이었지만, 차질이 생겨 케이스가 멈추고 재정적으로도 어려워졌다. DACA 수혜자가 됐을 때 가장 기뻤던 점은 일을 할 수 있고, 운전면허를 딸 수 있다는 것이었다. 최근 결혼으로 영주권을 받았지만, 서류미비자 청년은 항상 불안한 마음을 안고 산다고 밝혔다. 차 씨는 “미국은 ‘내 나라’라고 생각하는데, 항상 미국을 떠나는 고민을 하고 서둘러 군대에 가거나 결혼을 하려는 등 기회가 제한돼 있다”고 했다.
◆“커리어 계획 어려워”, “장학금 부담 컸다”=2005년, 15살에 미국으로 온 장정래(34) 씨. 그는 아직도 백악관에서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의 DACA 발표를 생방송으로 지켜본 기억이 생생하다. 대학을 다니다 DACA 수혜자가 된 그는 이전까지만 해도 대학 후 커리어를 계획하기가 어려웠다. 자연스레 그의 커리어는 민권센터·뉴욕시장실 산하 이민서비스국(MOIA) 등 이민자들을 돕는 쪽으로 흘렀고 현재는 휴먼라이츠퍼스트에서 일하고 있다. 장 씨는 “극우 이민정책은 영주권자 등 합법 이민자 차별로도 나타날 수 있다”며 더 많은 한인이 이민정책 영향에 관심을 가졌으면 한다고 했다. 로펌에서 장학금을 받는 형태로 인턴 중인 서류미비자 박채원(24) 씨. 연방 무료학자금보조신청서(FAFSA) 지원이 제한되는 만큼 장학금을 받아야 한다는 생각에 부담이 컸다고 했다. 그가 로스쿨에 진학한 이유도 뉴욕·뉴저지주에선 서류미비자의 라이선스 취득이 가능해서다. 그는 “서류미비자 중엔 (강제) 고학력자가 많다”며 웃었다.
◆“어딘가에서 마지막 퍼즐 한 조각을 잃어버린 기분”=서류미비자 김성원(28) 씨는 가장 힘들었던 시기를 22~23살 때로 회고했다. 그는 과거 유효한 비자가 있어 다카 수혜자가 될 수 없었다. 대학 때까진 큰 문제가 없었지만, 졸업했던 2018~2019년 당시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가 쏟아낸 강경 반이민 발언은 그의 걱정을 키웠다. 김 씨는 “아무것도 없을 때, 인턴십을 시작한 친구들을 보며 우려하는 마음이 컸다”며 “친구라도 과연 내 신분을 이해할 수 있을까, 혹시 나와 (이민에 대한) 다른 생각을 하진 않을까 의문을 가졌다”고 했다. 그는 미주한인봉사교육단체협의회(NAKASEC)를 거쳐 현재 민권센터에서 서류미비자로서 같은 경험을 공유하는 한인을 돕는 데 열중하고 있다.
뉴욕지사 김은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