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책으로 인생배우기 (31)
과학적으로 바람은 공기의 흐름이다. 기체분자가 많은 고기압에서 기체분자가 적은 저기압으로 공기가 이동하면서 생기는 것이 바람이다. 바람은 그 세기에 따라 이름도 여러 가지다. 나뭇잎이 흔들리는 산들바람, 호수에 물결이 일렁이는 흔들바람, 큰 나무의 나뭇가지가 흔들리는 센바람, 지붕이 날아가기도 하는 노대바람, 무엇이든 날려버리는 싹쓸바람까지. 이마에 흐른 땀을 씻어주는 고마운 바람도 있고, 재앙을 몰고 오는 무서운 바람도 있다.
잠시 무더위를 식혀줄 산들바람 같은 그림책, 〈The Wind Blew〉는 단순한 내용과 발랄한 그림으로 유명한 영국 작가, 팻 허친즈의 작품이다. 나는 이 책을 아이들에게 날씨에 대한 이야기로 소개하고 바람의 종류를 배우고, 장난꾸러기 같은 바람을 쫒아가는 재미있는 놀이로 수업을 했다. 그리고 지금 다시, 오로지 나만의 느낌으로 이 책을 가만가만 읽다보니 보이지 않던 새로운 바람이 보인다. 보이지 않는 바람이 몰고 오는 어마어마한 이야기가 들린다.
바람이 분다. 화이트 씨의 우산이 바람에 뒤집혀 날아가고, 꼬마 프리실라의 풍선이 바람에 실려 날아가고, 모자와 연, 널어놓은 빨래도 바람에 뒤채여 하늘 저 위로 내던져진다. 코를 닦던 손수건도 판사님이 쓰고 있던 가발도 바람에 채여 올라가고, 집배원 손에 있던 편지들도 소용돌이치며 날아가고, 그러고도 바람은 점점 더 세차게 휘몰아쳐서 깃대에서 펄럭이던 줄무늬 깃발이 확 뜯겨 나가고, 쌍둥이가 목에 감고 있던 목도리까지 낚아채어서 하늘에서 빙글빙글 돌리며 갖고 논다. 사람들은 바람이 가져간 것들을 되찾으려 하늘을 향해 손을 뻗고, 달리고, 엉키고 야단법석이다. 그런데… … 바람은 마치 싫증이라도 난 듯, 가지고 놀던 그 많은 것들을 마구 뒤섞더니 아래로 내동댕이친다. 그리고는 바다로 불어가 버린다.
바람은 사람을 가리지 않는다. 아이, 어른, 여자, 남자, 백인, 흑인, 판사, 집배원…. 모두에게 바람은 불고 누구의 것이든 가리지 않고 가져간다. 사람들은 다음에 일어날 일을 예상하지만 막을 수 없고, 바람이 가져간 물건들을 돌려줄지, 않을지도 모르면서 바람을 쫓아간다. 모든 일은 바람에게 달렸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모든 것을 가져갈 수도 있고, 또 모든 것을 그냥 던져줄 수도 있는 바람이다. 여기서 바람은 단순한 공기의 흐름이 아니라 신에 가까워 보인다. 사람들의 마음을 실컷 애타게 하고는 놀이에 싫증 난 아이처럼 물건들을 내동댕이치고 마는 신. 동화 속에 사람들은 바람의 장난에 화를 내거나 대들지 않고, 다시 찾은 물건에 고마워하며 바다로 불어가 버린 바람에게 손을 흔든다. 바다에는 배가 떠 있고, 바람은 바다에서 또 어떤 장난을 할지 두렵기도 할 텐데 말이다.
‘생명력을 가지고 스스로 생성, 발전하는 것!’ 이것은 사전에 나오는 자연(Nature)의 정의이다. 스스로 만들어진 자연의 생물은 인간의 논리적 접근과 해석이 통하지 않을 때가 많다고 한다. 예고 없이 아무 데서나 갑자기 생겨나기도 하고, 도저히 형체를 파악할 수 없을 만큼 엄청나게 엉켜 있기도 하며, 하나의 조건 안에서 수백만 가지로 변형되었다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기도 한다는 것이다. 생물은 과학적 논리가 풀 수 없을 만큼 다양하고, 그 다양성이 촘촘히 서로 엮여 균형을 이루고 있다. 그래서 자연은 강하다. 무언가 한 쪽이 잘못되어도 자연은 스스로 다른 방법을 찾아 균형을 맞추어 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 세계는 홍수, 폭염, 폭풍 같은 극단적 이상기후로 몸살을 앓고 있다. 이상기후의 원인은 주로 지구온난화 때문이고, 지구온난화의 책임은 산림훼손과 화석연료를 사용하는 인간에게 묻고 있지만, 지구 에너지 변화와 지구 공전 궤도와 자전축의 변화라는 인간이 어쩔 수 없는 자연의 변화이기도 하다. 신의 놀이도 자연의 균형도 인간의 힘으로 바꿀 수는 없다. 그러나 포기할 수도 없다. 바람이 불면 바람이 부는 데로 열심히 쫓아가 볼 일이다. 부조리한 신이 인간을 만들었는지, 부조리한 인간이 신을 만들었는지는 알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