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 미국 출장자가 있어서 그 편으로 고춧가루, 멸치, 화장품, 그리고 시원한 여름 옷 몇벌 챙겨 보낸다.” 큰딸, 한국에 있는 나의 첫째 언니가 이번에도 번거로움을 마다 않고 부탁을 한 모양이다. 나로서는 모르는 분에게 물건을 배달시킨다는 것이 무척이나 미안하고 불편한 일인데 우리 집안의 큰언니는 아무렇지 않은 듯 그렇게 쉽게 일을 처리한다.
친한 지인의 남편이라며 괜찮다고만 한다. 나는 그런 언니의 행동에 불편한 부탁은 하지 말라고 애써 보내준다는 사람한테 아쉬울 것 없는 사람처럼 무정하게 말했다. 그럴 때마다 언니는 가는 길에 부탁하는 것이니 그렇게 미안해하지 않아도 된다며 오히려 나의 소심하고 귀찮아 하는 마음을 나무라며 어리석게 군다고 한마디 한다. 우리는 늘 그렇게 자신의 방법으로 사람을 대하고 일을 처리한다.
오 남매 중 첫째 딸인 언니는 오빠가 한 명 있고 여동생이 셋이 있다. 집안에서 만능 해결사로 통하는 언니는 매사에 적극적이고 결과적으로 많은 일들을 해결해 놓는다. 지금도 홀로 계신 엄마를 아침, 저녁으로 전화하여 무엇을 드셨는지 오늘 하루는 어떻게 보냈는지 묻고 확인하며 보살피는 일에 마음을 아끼지 않는다. 부모만이 아니라 형제, 누구에게라도 어려운 일이 생기면 어떻게 하든지 그 어려움을 덜어주고자 방법을 찾아내고 해결을 하려고 애를 쓴다.
이기적인 나는 그런 모습을 보면서 마음 한 켠에선 언니의 그 마음씀이 부담으로 느껴지기도 했다. 그냥 알아서 해결할 수도 있을 텐데 미리 앞서 자신의 방식으로 많은 문제를 풀어주는 것 또한 지나친 관심과 관여라고 말할 때가 많았다. 내가 암 진단을 받았을 때도 언니가 미국으로 와서 간호를 해주겠다고 했다. 나는 남편과 아이들이 든든한 보호자가 되어주니 너무 걱정하지 말고 있으라 말하고 오겠다는 언니를 극구 말렸다.
조금은 서운했을 언니의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니지만 나 역시 용기와 절제를 해야 하는 순간이여서 그렇게 하기로 했다. 언니는 불안하고 걱정된 마음으로 바로 나에게 필요한 많은 것들을 한 보따리 챙겨서 비행기로 날려 보냈다. 역시 우리 큰언니였다. 내가 초등학교 시절, 밖에서 친구들과 노느라고 숙제도 안하고 있으면 나의 숙제를 체크하고는 기어코 숙제를 하게 만들었고 나의 첫 생리가 시작된 날도 배가 아파 울고 있는 동생을 따뜻하게 해야 한다며 아랫목에 뉘여놓고 생리대와 필요한 물품을 챙겨 착용 방법과 주의 사항을 자세히도 일러주었다.
그당시 유행하던 춤을 알려 준다고 동생들을 모아 놓고 시범을 보이며 따라하게 만든 것도 큰언니였다. 그 덕분에 소풍 가서 장기자랑 시간에 벌떡 일어나 토끼 춤인지 말 춤인지 모르지만 언니가 가르쳐 줘서 열심히 따라 추던 춤을 선 보이기도 했다. 재미난 추억이다. 형부와 언니는 둘 다 맏이들이다. 그래서인지 두 사람 모두 마음씀이 남다르 긴 하다. 시부모님 병 간호, 친정 아버지 마지막 병간호까지 언니는 정말이지 힘들었을 그 시간에도 눈빛은 빛나고 있었고 얼굴엔 미소를 잃지 않았다.
내가 언니한테 어찌 그렇게 부모님들에게 잘 할 수 있느냐고 힘들지 않느냐 물으면 뭐가 힘드냐고 말한다. “해드릴 수 있을 때 해야지” 언니는 가족들을 챙기고 돌보는 것이 아무래도 언니의 소명인 것 같다고 한다. 고단하고 지치지 않을까 염려되지만 걱정만 하고 제대로 하지 못하는 나는 고맙고 미안해 아무런 말도 할 수 없다. 언니는 “그것도 너의 자리. 이 또한 나의 자리.” 하면서 다 괜찮다고 말한다.
많이 나누어 주는 자가 더 많은 걸 얻는다 했던가, 언니는 지금 차고 넘치는 사랑과 풍요로움을 가진 사람이 되었다. 제법 묵직한 짐 안에는 언니의 따뜻하고 소중한 마음이 함께 들어 있었다. 그렇게 반짝이는 눈빛으로 주변을 살피고 있을 우리 집안의 해결사, 너무나 고맙고 든든한 큰 언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