딩동! 벨이 울렸다. 문을 열어 보니 이사 가는 이웃이 커다란 봉투 하나를 가슴에 안겨주었다. 떠나기 전에 급하게 뽑느라 엉망이니 잘 다듬어서 먹으라는 것이었다. 고맙다는 인사도 제대로 나눌 틈 없이, 잘 가라는 인사도 나눌 틈 없이 그녀는 돌아섰다.
길모퉁이로 사라지는 자동차를 바라보며 한동안 허전해할 그녀의 빈 자리가 느껴졌다. 손에 든 봉투 안에는 붉은색을 띈 싱싱한 상추와 대파가 가득했다. 덥수룩한 수염처럼 잘 자란 뿌리를 감싸고 있는 촉촉한 흙냄새가 코끝을 간지럽혔다. 이제 막 자라기 시작한 상추들도 있었다. 먹기 좋게 잘 자란 상추는 놓아 두고 나머지는 뒷마당에 심으며 뿌리가 잘 내려 자랐으면 좋겠다는 바람으로 토닥였다. 대파도 어쩜 이렇게 잘 키웠는지, 그녀의 정성스러운 손길이 느껴졌다.
상추와 파를 잘 다듬고 씻어서 알맞게 자른 뒤 통에 넣었다. 수북하게 쌓인 파 뿌리들은 흙이 없어질 때까지 씻고 또 씻었다. 배와 함께 푹 끓여서 차로 마시면 좋다는 말이 생각나서였다. 어쩌면 그녀의 손길과 정성 가득한 마음이 소중하게 느껴져 작은것 하나라도 버리고 싶지 않았다. 제법 시간이 걸렸다. 저녁 준비할 시간이라 서둘러서 버릴 것들을 봉투에 주워 담는데 뭔가 느낌이 불길했다. 엄마야! 제법 큰 지렁이 한 마리가 내 손에서 툭 떨어지는 것이었다.
얼마나 놀랐는지 정리하던 것을 던지고 몇 걸음 물러났다. 온몸이 근질근질, 징그러워서 가까이 갈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남편이 올 때까지 기다릴 수도 없고, 곧 싱크대 밖으로 기어 나올 것 같은 기세로 꿈틀거리는 것을 바라만 보고 있을 수도 없었다. 지금까지 어디 숨었다가 이제야 나온 걸까? 숱하게 만지작거리며 채소를 다듬고 있을 동안 요리조리 잘도 숨어 있었다는 것이 괘씸하기도 했다. 내 손이 스쳤을 거라 생각하니 손가락 끝이 저려왔다. 호들갑스럽게 유난 떤다고 하겠지만 내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심지어 지렁이가 무섭기까지 했다.
이제는 곧 기어서 올라올 것 같이 꿈틀거리는 것을 보고 있을 여유가 없었다. 면장갑 위에 고무장갑을, 그 위에 비닐장갑을 하나 더 끼고 비닐봉지를 뒤집어 지렁이를 덮었다. 점점 뒤틀림이 커지는 소리를 들으며 우여곡절 끝에 잡아서 뒷마당 텃밭 위에다 털었는데 보이지가 않았다. 나오는 길에 어디 흘린 건 아닌지 갑자기 진땀이 났다. 비닐을 다시 뒤집어도, 흙 위를 훑어봐도 안보였다. 가뜩이나 나빠진 시력 때문에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열심히 보았지만 찾을 수가 없었다. 짧은 순간에 머릿속이 복잡해질 무렵 꼬물거리며 흙 속으로 파고드는 것이 보였다. 후유! 끝났다.
예전에 열심히 텃밭을 만들어서 자신 있게 농사꾼 흉내도 내 보았지만, 손 들었다. 땅만 파면 나오는 지렁이를 보며 도망가는 콩알만 한 심장으로 흙과 어떻게 친해질 수가 있겠는가. 그렇다 보니 텃밭이 지금은 거의 풀밭이 되어가고 있다. 무성하게 자라는 잡풀 사이로 부추와 깻잎, 신선초와 미나리가 끈질긴 생명력으로 버티고 있는 것이 신기할 뿐이다. 어쩜 그 아래서 열심히 일을 하는 지렁이 덕분에 그거라도 필요할 때 요긴하게 쓰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녀가 남기고 간 지렁이 한 마리도 땅 속에서 아쉬워 말라며 꿈틀거리고 있을 것이다. 덕분에 일용할 양식을 얻게 되어 오히려 고마워 해야 했는데 호들갑을 떤 것 같아 미안한 생각도 들었다.
오랜만에 고기를 구웠다. 쌈장을 만들고 된장국도 끓여서 저녁상을 차렸다. 깻잎과 신선초도 상추와 함께 접시 위에 한가득 담았다. 인사말도 제대로 나누지 못한 그녀와의 이별로 울적했을 시간을 지렁이 한 마리가 바꿔놓고 기분 좋은 저녁상을 차리게 해 준 것이다. 맛있게 먹는 남편을 바라보며 정말 귀한 상추라는 말과 함께 오늘 있었던 웃지 못할 헤프닝을 늘어놓았다. 꿀맛 같은 행복을 맛보며 해질 녁 하늘을 바라보니 감사의 기도를 드리는 밀레의 만종이 그려졌다. 또 하나의 감사함을 배우는 겸손의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