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의 시니어 모임에서 그룹별로 자신이 받은 은혜를 서로 이야기해 보는 시간이 있었다.
내가 앉은 둥근 테이블에는 노인 남자만 일곱 명이 둘러앉았다. 한 분이 먼저 자기가 받은 많은 은혜 중에 가장 기억나는 것을 발표했다. 그분은 머리카락이 엷어지고 하얗게 변하는 80을 바라보는 나이였다. “40년 전, 아내가 목에 암에 걸렸어요.” 그분은 그때를 생각하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40년 전이면 30대 후반이었을 것이고, 그때 아내가 암에 걸렸다면 그게 어떻게 은혜가 될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는 의사로서 미국에 와서 자신의 병원을 차린 초기, 아메리칸 드림을 실현하려는 시점일 것이다.
“아내가 목에 뭐가 있다고 해서 만져보니, 작은 멍울이었어요. 암 전문의에게 각종 진단을 받았습니다. 암이었어요. 어린 애들 셋은 병원 직원의 집에 보내고 생각하니 모든 꿈이 한순간에 다 사라진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암은 수술로 떼어냈고, 깔끔하게 나았죠. 지금 그때를 돌아봅니다. 암은 누구에게나 와요. 죽는 사람도 많아요. 암세포가 온몸에 퍼지지 않은 때 일찍 발견한 것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모르겠어요. 닥친 위기를 벗어난 것, 아내가 건강을 회복한 것, 가족들이 모두 건전하게 살아가는 것, 지금 돌아보면 모두가 은혜였습니다.”
번째 분이 은혜받은 이야기를 했다. 그의 아버님이 늙고 병든 몸으로 고생고생하시다가 결국 끝도 없는 아픔과 절망에서 해방되시듯이 암으로 돌아가신 이야기를 했다.
첫 번째 분이 암에 걸린 후 치유된 은혜로 이야기를 시작해서인지, 세 번째 분도 암에 걸린 이야기를 했다. 직장암에 걸린 그는 쿼블러 로스가 설명한 위기에 처한 사람들이 거치는 5단계, ‘부정·분노·거래·좌절·수용’의 5단계를 거치면서, 지금은 직장암에 걸린 상태를 수용하게 되었다고 했다. 이젠 수술도 성공적으로 끝냈고 후유증도 없이 잘 치유과정에 있다고 했다.
대장암은 초기엔 증상이 잘 드러나지 않아 암이 발견되면 암세포가 이미 전신에 퍼져 손을 쓸 수 없는 경우가 많은데, 암세포가 몸 안에 퍼지기 전에 발견된 것도 천만다행이요 은혜이고, 암이 직장에서 조금만 밑에 생겼더라면 수술할 때 항문을 다 들어내야 하는데, 그러면 평생 항문이 없이 똥 주머니를 차고 다녀야 하는데, 다행인지 은혜인지, 암이 항문을 떼어내지 않아도 되는 위치에 생겨 감사하다는 이야기를 나누며 그분은 받은 은혜로 행복하게 웃었다.
집에 와서도 암에 걸린 이야기들이 은혜로 연결된 것이 묘하게 느껴졌다. 만일 내가 받은 은혜를 발표한다면 무엇을 말할까 생각해 보았다. 수많은 병을 앓았지만 지금까진 암에 걸리지 않은 것도 은혜다. 암에 걸렸던 분들과 비교하면 암에 안 걸린 것인 더 큰 은혜이지만, 가슴에 감동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더 큰 은혜가 감동이 없다니, 패러독스다.
내 일생에서 고마운 사건들, 내가 노력해서 얻은 것이 아니라 주어진 은혜 중에 내가 생각할 수 있는 감동적인 은혜는 무엇일까? 건강하게 태어난 것, 여든 중반이 넘도록 살아있는 것, 아내가 아직도 건강한 것, 아이들이 건전한 것, 좋은 선생님들을 만나 내 인생의 진로를 바꾼 것, 바라던 직장에서 오래 일하고 은퇴한 것, 수많은 사람을 죽인 태풍이나 전염병, 교통사고나 총기사고가 나를 비껴간 것, 찾아보면 끝이 없을 것 같은 감사한 일들이 생각난다.
내가 받은 은혜를 찾아보니 보인다. 찾는 자가 찾고, 구하는 자가 구하고, 문을 두드리는 자에게 문이 열린다는 말씀이, 은혜를 찾는데도 적용된다. 받은 은혜도 찾아보아야 보인다.
나는 산골에서 살다가 전쟁 후에 서울로 왔다. 장갑 장사, 사과 장사, 신문 돌리기, 회람잡지 돌리기, 소독수 등 일을 열심히 하며 야간 고등학교, 야간대학을 다녔다. 고등학생 때 ‘찾는 자가 찾고, 구하는 자가 구하고, 두드리는 자에게 문이 열린다’라는 말씀을 붓으로 써서 벽에 붙여 놓고 아침에 일어나면 그 글을 읽고 하루를 시작했다. 일거리가 없으면 열심히 찾고 구했다. 신문 잡지 구독자를 찾아 열심히 문을 두드렸다.
미국 대학에서 40년 넘게 일하고 은퇴한 것도 은혜이다. 붓으로 써서 붙여두고 아침마다 읽던 그 말씀을 일찍 만난 것도 은혜다.
감사하며 사는 사람이 가장 행복하다. 은혜를 찾아야 감사를 느낄 수 있다. 나도 찾아보니 내가 노력해서 얻은 것보다 값없이 주어진 은혜가 더 많다. 받은 은혜를 찾으며 늘 감사하며 행복하게 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