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움을 담아낸 편지는 절절한 울림의 꽃이 핀다. 편지는 건절함이요 그리움이다. 누군가에게 연서(戀書)를 보낼 수 있고 또한 받을 수 있다는 건 행복한 일이다 요즘 대한민국에서 화제가 되고 있는 어느 돈 많은 분의 시끄러운 로맨스사건을 지켜보며 문득 반 세기 전 두 남녀의 순애보가 떠올랐다.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오늘도 나는 너에게 편지를 쓰나니/ 그리운 이여 그러면 안녕!/설령 이것이 이 세상 마지막 인사가 될지라도/ 사랑하였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하였네라.”
‘행복’은 유치환이 여류 시조시인 이영도에 대한 애끓는 연모의 마음을 담아 쓴 연시로 알려지고 있다. 그 시절 그는 처자식까지 거느린 기혼자였다. 청마가 이영도를 처음 만난 건 경남 통영에서였다. 1908년 거제에서 출생해 어린 시절을 통영에서 보낸 청마에게 그곳은 자신의 고향이나 다름없는 곳이었다. 일제 강점기 때 통영협성상업학교 교사로 근무중 일제의 검속대상에 올라 만주에 사는 형 집으로 피했던 청마는 해방 후 부인과 함께 통영으로 내려와 부인은 유치원을 운영하고, 자신은 막 통영여중의 국어교사로 부임하던 무렵이었다.
청마는 운명처럼 그곳에서 호수처럼 맑고 단아한 미모를 가진 가사과 교사를 동료로 만나게 된다. 촉망받는 여류 시조시인으로 주목받고 있던 정운 이영도였다. 이영도는 당시 젊은 나이에 폐결핵으로 남편을 잃고 딸 하나를 의지해 살아가던 청상과부였다. 스물한 살 때 출가해 미망인이 되긴 했어도 아직 스물아홉 여성의 고운 미모와 문인으로써의 기품을 두루 갖춘 요조숙녀가 바로 청마의 짝사랑 상대였다.
청마는 호수에 비친 사슴의 눈처럼 맑은 눈망울을 가진 이영도를 본 순간 넋을 잃고 말았다. 무엇보다 청마의 마음을 사로잡은 건 문학에 대한 그녀의 넓고 깊은 식견이었다. 이영도는 이미 어린 나이에 시조로 문단의 주목을 받고 있던 여류시인이었다. 애써 감추려 했지만, 청마의 마음속에서 시작된 연모의 불길은 쉽게 꺼지지 않았다. 결국 1947년부터 그는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이영도에게 연서를 보내기 시작한다. 하루에도 몇 번씩 교무실에서 얼굴을 마주치는 짝사랑의 상대. 하지만 청마는 활활 타오르는 사랑의 마음을 담은 시와 산문을 써서 우편으로 보냈다. 그 시절 이영도에게 보낸 청마의 편지에는 애오라지 사랑을 갈구하는 한 사내의 애타는 마음이 눈물처럼 배어있다.
“바람 센 오늘은 더욱 더 그리워/진종일 헛되이 나의 마음은/공중의 깃발처럼 울고만 있나니/오오, 너는 어드메 꽃같이 숨었느냐” 또 청마는 어떤 글에서는 자신의 운명을 이렇듯 솔직하게 탄식하기도 한다.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파도야 어쩌란 말이냐/이은 물같이 까딱 않는데/파도야 어쩌란 말이냐/날 어쩌란 말이냐”하지만 청마의 절규에도 불구하고 이영도의 마음은 쉽게 열리지 않았다. 아직은 자유연애가 집안사람들의 체면을 깎아내리는 방종으로 인식되던 시기였으니, 가정까지 있는 아홉 살 연상의 남자에게 함부로 마음을 내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애틋한 짝사랑을 고백하기 3년, 마침내 이영도도 청마의 갸륵한 마음을 받아들이게 된다. 그렇다고 해서 두 사람의 관계가 유부남과 청상과부의 불륜관계로 이어진 것은 아니었다. 두 사람의 사랑은 어디까지나 ‘플라토닉’한 것이었다. 이영도 또한 이제 걷잡을 수 없이 마음 안으로 쏟아져 들어온 청마에 대한 사랑을 수줍게 표현한다. “오면 민망하고 아니 오면 서글프고/행여나 그 음성 귀 기울여 기다리며/때로는 종일을 두고 바라기도 하니라//정작 마주 앉으면 말은 도로 없어지고/서로 야윈 가슴 먼 창만 바라보다가/그대로 일어서 가면 하염없이 보내니라”
청마는 1967년 귀갓길에 시내버스에 치여 숨을 거둘 때까지 이십 년 동안 이영도에게 무려 2000통이 넘는 연서를 보냈다고 한다. 죽음이 서로를 갈라놓을 때까지 청마는 숱한 세월의 격랑을 꿋꿋이 버티며 애끓는 사모의 마음을 간직했던 로맨티스트였던 거다. 나중에야 이영도에 대한 남편의 애끓는 사랑을 눈치챈 부인은 “그토록 목숨 같은 사랑인데 어찌하겠어요”라는 말로 탄식하고 말았다고 한다. 세상에는 참 많은 종류의 사랑이 있다. 그리고 그 어느 것도 당사자에게 절실하지 않은 사랑은 없다. 청마와 이영도의 사랑 역시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누군가는 이들의 플라토닉한 사랑 역시 정신의 외도라고 손가락질하거나, 무책임한 유부남과 순진한 여선생의 불륜이라고 비난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대체 당사자 아닌 그 누가 함부로 사랑의 깊이를 측량할 수 있을까.
이영도는 유치환이 사망하자 수필 ‘유성(流星)’에서 그 슬픔과 충격을 이렇게 표현했다. “일찍이 나는 사랑하는 이와 더불어 흐르는 별똥을 향해 아픈 기원을 나누어 왔다. 우리들의 목숨이 같은 날 같은 시각에 죽어서 멀고도 창창한 영겁(永劫)의 길을 동반할 수 있기를 빌었던 것이다. 그러나 뜻하지 않는 죽음으로 하여 본의 아닌 배신을 그는 저질렀고, 남은 나는 함께 우러르던 그날의 성좌를 버릇처럼 우러러 섰다. 이제 나는 유성을 두고 어떠한 원력(願力)을 세울 것인가.” ‘같은 날 같은 시각에 죽어서’ 영겁의 길을 동반하길 빌었을 정도로 이영도의 유치환에 대한 사랑이 애틋했는지도 모른다. 유치환과 이영도의 사랑은 반세기가 지났지만, 아직도 플라토닉 사랑으로 세간에 맑은 물방울처럼 적적(寂寂)히 남아있다. “사랑은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한다”라는 말이 있다. 내가 누군가를 사랑하고 누군가가 나를 사랑해주는 것은 결국 우리가 정상적이며 깨끗하고 행복하게 살아가게 하는 원동력이 된다. 사랑은 그런 힘을 가지고 있으며 우리 모두의 마음에는 그 사랑이 존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