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처럼 음악 연주회에 참가했다. 피아니스트 부인과 은퇴한 의사인 첼로 연주자인 남편이 연주하는 음악회가 열리는 저녁을 축복하듯, 100년만의 최악의 허리케인 헐린이 끝나고 바람과 비와 구름으로 덮였던 하늘에서는 반짝 가을 햇살이 퍼졌다. 폭풍 때문에 걱정했던 연주회가 열리는 저녁엔 단풍 든 가로수에 햇빛이 반짝이고, 연주실은 청중으로 가득 했다.
피아노가 바로 보이는 객석 앞 자리에 앉아 연주가 시작되기를 기다리는 동안, 옛날 클래식 음악 감상을 배우려고 친구를 따라 르네상스, 세시봉, 돌체라는 음악 감상실에 갔었던 때가 생각났다. 1950년대 중반이었다. 그 이후 클래식음악과 떨어져서 살아왔는데, 늙은 지금 다시 그 때의 음악회에 와 있는 느낌이었다.
피아노 연주 곡 첫 번으로 슈베르트의 즉흥곡이 연주되었다. 연주하시는 분이 눈을 지긋이 감았고 고개와 머리는 선율을 따라 출렁거리고, 두 손은 독립된 생명체인양 건반위에서 춤을 추었다. 나도 눈을 감고 소리에 집중해보았다. 잔잔한 냇물이 흐르듯 가을 하늘에 구름의 냇물이 흘러가는 이미지가 떠 올랐다. 아름다운 소리로 만들어진 감정의 냇물이었다. 두번째 피아노 곡은 쇼팽의 발라드였다.
“아, 명상하는 것과 음악 감상은 비슷한 점도 있구나!” 그런 생각이 떠 올랐다. 요즈음 일상에서 시간이 날 때 마다 명상을 배운다. 누구를 기다리는 차 안에서, 할 일이 없이 멍하니 있을 때 눈을 감고 호흡을 의식적으로 길게 하며, 무의식적으로 흘러가는 내 생각들을 비우고 마음의 평정을 찾는 명상을 연습한다. 피아노 소리의 흐름을 따라가니 명상하는 것과 비슷한데, 음악엔 흐름에 아름다운 꿈틀거림이 있다.
한 곡이 끝날 때 마다 박수가 터졌다. 문득, 옛날 피아노 소리를 듣던 기억이 떠 올랐다. 1950년 초반, 야간 고등학교를 다니며 낮에는 회람잡지를 돌리던 때였다. 월간 잡지를 구독하는 집마다 일주일에 한 번씩 잡지를 바꾸어 주려고 가면, 어떤 집에서는 피아노 소리가 대문 밖에서도 들렸다. 그 땐 피아노를 가진 집은 서울에서도 드물었다. 피아노 소리를 들으며 대문을 두드리지 않고 서성거린적도 있다. 대문을 두드리면 가끔은 식모 대신 피아노 치던 여학생이 나와 어머니나 아버지가 보는 잡지를 바꾸었다. 그때 들은 피아노 소리는 가까우나 내가 건너기엔 깊은 강이 흐르는 거리를 느꼈다.
첼로와 피아노 협주곡에서는, 두분 다 악보도 보지 않고 연주하시고 두 악기의 소리의 완벽한 하모니를 만드는 모습을 보면서 생각이 났다. 저 정도가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을 연습하고, 연습하는 동안, 두악기가 만드는 소리가 아름다운 하모니를 이루어 질 때까지 두 분은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을까? 그 과정에서 그들이 서로를 보완하며 더 성숙한 아름다운 관계와 집안의 분위기를 화목하게 만들어 가지 않았을까?
연주회 시작에서 끝까지 모든 진행을 보이지 않는 뒤에서 빈틈없이 진행하는 3명의 예쁜 따님들이 있었다. 가족 행사의 완벽한 진행을 위한 가족 간의 협조도 음악 연주의 완벽한 하모니를 이루기까지의 과정에 기여했을 것이다.
의사인 남편 직장이 펜실베이니아주 시골 병원으로 결정되었던 40여년 전, 부인은 처음엔 외로웠다고 했다. 7살부터 각광받으며 익히고, 대학에서 전공한 피아노 실력이 빛을 보지 못했다. 그런데, 그곳에 있는 디킨슨대학의 음악 디렉터와 알게 되고 그 분과 더불어 연주활동을 하게 되어 피아노실력이 더 완숙할 기회를 만들었고, 많고 다양한 사람들에게 아름다운 음악을 공유할 수 있었다고 한다.
준비된 8곡의 연주가 끝나고 앙코르 곡으로 들드라의 추상이 연주되었다. 나 같은 음악의 문외한도 귀에 익은 곡이었다. 너무나 아름다워 눈길을 돌리지 못하게 하듯, 소리의 율동이 내 의식을 잡고 황홀의 경지로 흘렀다. 빙상의 피겨스케이트 보다 더 빨리, 더 우아하게 하늘과 지상을 오가며, 소리가 아름다운 이미지와 감성의 율동을 만들었다. 가을 저녁에 잘 어울리는 곡이었다.
기립박수 소리로 연주회를 끝막음 했다. 연주회가 끝나고 인사를 할 때 75세 된 피아노 연주자의 손, 연주자가 보지 않아도 건반위를 요정처럼 춤추던 두 손을 일부러 잡아 보았다. 물론 눈이 달리지 않고, 다른 분의 손과 같았다.
연주회가 끝나고 개스사우스 매그놀리아 홀에서 리셉션이 있었다. 아름다운 음악을 감상하고 난 후라서 그런지, 사람들이 둘러 앉은 둥근 테이블마다 웃음 소리가 즐겁다. 음식과 음료수를 즐기며 우정도 쌓고, 서먹한 사이도 가까워지고 모르던 분들도 알게 되었다. 같은 것들이 반복되는 생활리듬 속에 클래식 음악 감상은 드물기에 귀하고 아름다운 경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