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아텍 출신 공학박사…50년 써온 서예 수준급
외래어 표기법 오랜 연구 ‘새 표기법’ 만들어 눈길
미래 한글 위한다면 개선 목소리 귀 기울여야
한글은 지구상 모든 언어의 발음을 표기할 수 있는 유일한 문자다, 라고 학교 때 배웠다. 하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을 확인하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미국 생활에서도 정확히 한글로 표기할 수 없는 발음들이 많다. 똑같은 단어를 놓고도 애틀랜타로 쓰는 사람이 있고 아틀란타로 표기하는 사람도 있다. 땡큐-생큐도 그렇고 아예 산호세-새너제이처럼 전혀 다른 표기도 버젓이 쓰인다. 한국 국립국어원에서 정해 놓은 표기법과 실제 발음과의 차이 때문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한국의 외래어 표기 방식을 재정비해야 한다는 주장이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다. 애틀랜타에도 이런 문제의식을 가지고 오랫동안 한글 표기 방법 개선을 연구해 온 사람이 있다. 조지아텍 출신 공학박사이자 50년 이상 서예를 즐겨온 김진기(63)씨다.
마침 10월 9일이 578돌 한글날이다. 미주 한인 이민자로서 우리말 우리글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보는 기회가 되기를 기대하며 김진기 박사와의 대화를 소개한다.
서울 전시회에 출품 중인 김진기 박사의 작품들. 그가 제안한 영문 fvrz의 한글 표기법 적용한 작품들이다. 새 한글 자음 표기법을 돌에 새겨 만든 서각(書刻) 작품을 중심으로, 양쪽에 대련(對聯) 형식의 작품을 배치했다. 표구 대신 비용이 들지 않고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액자를 이용한 것이 이채롭다.
– 현재의 외래어 한글 표기는 무엇이 문제인가?
“지금 공식적인 외래어 표기는 1986년 국립국어원이 제정한 표기법에 따르고 있다. 부분적인 수정과 보완은 있었지만 큰 틀은 바뀌지 않았다. 가장 논란이 되는 것은 영어의 경우 L과 R, F와 V, Z, Th 발음표기다. 이를테면 L과 R은 똑같이 리을(ㄹ)로 표기해야 한다. F와 P도 같은 피읖(ㅍ)이고, V와 B도 똑같이 비읍(ㅂ)이다. 그렇게 표기된 한글을 읽으면 원래 발음과 전혀 구별이 안 되고, 현지에선 알아듣지도 못한다.”
– 지금 쓰는 한글 자모 24자로는 해결책이 없나?
“세종대왕 한글 창제 당시 원래 있었던 28자가 그대로 있었다면 지금 같은 혼란은 덜했을지 모른다. 두 입술을 가볍게 붙였다 떼면서 내는 순경음 글자라면 P는 ‘ㅍ’으로 F는 순경음ㅍ(ㆄ)으로 달리 표기하고, V도 마찬가지로 순경음ㅂ(ㅸ)으로 표기하면 지금보다는 나았을 것이다. 하지만 현재는 그것도 못하고 있다.”
–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
“현재 있는 글자를 병렬로 겹쳐 쓰면 된다. 예를 들어 정확히 표기하지 못하는 4개의 영어 발음 F-R-V-Z를 한글 자음을 2개 겹쳐 표기하자는 것이다. F는 ‘ㅍㅎ’, R은 ‘ㄹㄹ’, V는 ‘ㅂㅎ’, Z는 ‘ㅈㅎ’로 쓰는 것인데 이렇게 하면 지금의 한계를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다. 따로 문자를 만들지 않아도 되고, 디지털 시대에 맞게 자판 입력에도 문제가 없다. 언어는 약속이니까 정부 당국에서 새 표기법을 공식적으로 정하고 보급하면 된다.”
중국 간체자로 쓴 서법(書法). 슈파라는 중국어 발음을 새 한글 표기로 기록했다.
– 국어학자도, 언어학자도 아닌데 왜 이런 일에 관심을 가지게 됐나.
“우리의 우수한 한글이 그 가치를 충분히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는 안타까움 때문이다. 한국의 위상은 예전과 확연히 달라졌다. 세계인이 한글을 배우고 있고, 각국의 언어를 한글로 표기해야 할 경우가 점점 더 많아질 것이다. 그럴 때 보다 정확한 발음표기가 가능하다면 한국 사람이 세계와 소통할 때 지금처럼 File을 Pile로 발음하는 것 같은 문제 때문에 고통받지는 않을 것이다. 한국이 얻을 수 있는 문화적, 경제적 가치도 천문학적일 것이다. 그런 일에 작은 도움이라도 된다면 그만한 보람이 없을 것 같다.”
– 비슷한 제안을 하신 분들이 이미 많이 있었다. 혼자만 주장한다고 쉽게 될 일은 아닌 것 같다.
“계란으로 바위 치기 일 수 있다. 하지만 국민 대다수가 원하면 바뀔 수 있다. 당장 안 된다면 훗날 누군가가 또 계속 시도하면 된다. 요즘 세계 곳곳에 열혈 한류 팬들이 있다. 그들 중 유명 유튜버나 한국을 좋아하는 언어학자 같은 분들도 있을 것이다. 그들이 이 일에 관심을 가지기만 하면 큰 도움을 받을 수 있다고 본다. 개인적으로는 세계 어디서는 접근 가능한 온라인 한글 서예 전시장을 구상하고 있다. 이 역시 관심 있는 유튜버에게는 좋은 콘텐츠 소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BTS 팬 그룹인 각국의 ‘아미’도 좋고, 구글이나 테슬라, MS 등 AI로 한글이 필요한 큰 회사에 한글 표기법의 국제 표준화를 건의해 보는 것도 방법이 아닐까 싶다.”
– 본인이 제안한 한글 표기법으로 작품을 만들었다던데.
“사진에 보이는 작품들이다. 대학 시절 서예회에서 활동했다. 그 인연으로 지금 서울서 열리고 있는 서울대 서예회 창립 60주년 기념전에 출품했다. 재학생과 동문들이 함께한 뜻깊은 전시회다.”
– 흔히 보던 서예 작품과는 많이 달라 보인다.
“제목이 ‘훈민정음: 세계의 한글: F ㅍㅎ, R ㄹㄹ, V ㅂㅎ, Z ㅈㅎ’이다. 내가 제안한 새 한글 표기법을 돌에 새겨 만든 서각(書刻) 작품을 중당(中堂)으로 삼고, 양쪽에 대련(對聯) 비슷한 형식의 작품을 배치했다. 서체는 한글, 한자, 영어 등을 다 써 봤다. 표구 대신 비용이 들지 않고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액자를 이용한 것도 새로운 시도라 할 수 있다.”
– 지금까지 계속 작품 활동을 하는 걸 보면 평생 붓을 놓지 않았다는 말씀인데, 미국에서 쉽지 않았을 것 같다.
“생각을 바꾸니 가능했다. 서예용 붓 대신 그림물감 붓, 서양화 붓, 페인트 붓 등 아무거나 다룰 줄 알면 그것을 쓰면 된다. 값비싼 화선지가 아니어도 되고 꼭 먹을 고집할 필요도 없다. 애틀랜타에선 한국에서처럼 문방사우를 쉽게 구할 수 없어 솜이나 종이, 천을 뭉쳐 붓 대신 사용했다. 한 개 5불 미만의 중국산 조그만 붓도 나쁘지 않았다. 획의 두께 조절이 쉽고, 쉬어 가고 빠르게 가면서, 운필법과 필력을 오히려 더 잘 표현할 수 있었다.”
– 서예는 정적인 예술인데 디지털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이야기도 있다.
“꼭 그렇지는 않다. 이 역시 생각을 바꾸면 어디서나 쉽게 서예를 즐길 수 있다. 예를 들어 크리넥스 휴지에 농도 낮은 담묵으로 글씨를 써 작품을 만들면 된다. 또 사진을 찍어 NFT 형식으로 전자 파일로 보관하다가 원할 때면 종이에 프린트하거나 나무판에 새겨 걸면 된다. 쉽게 쓰고 지우고, 사이버 공간에 보관하고 필요할 때 다시 꺼내 활용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디지털 환경에 딱 어울리는 초현대 친환경 서예일 것이다.”
– 그렇게 되면 서예 본연의 정체성이 없어지는 게 아닐까.
“서예는 본질적으로 글자에 담긴 뜻을 최대한 ‘보기 좋게 치장하여’ 타인에게 전하는 예술이다. 그렇게 본다면 문자를 쓰는 행위와 그 결과물은 모두 서예가 될 수 있다. 다양한 변주가 가능하다는 말이다. 요즘은 서양식 잉크로 한글을 디자인적으로 예쁘게 그려내는(?) 캘리그래피가 유행인데, 이 또한 기본은 서예라고 봐야 한다.”
크리넥스 휴지에 담묵으로 쓴 김진기 박사의 행예(行隷)풍 글씨. 예기비의 예서체와 여초, 일중으로부터 배운 붓의 흐름과 최선호 화백에게 사사하며 익힌 사군자 획의 느낌으로 먹이 번지지 않게 빠르게 썼다.
– 곧 한글날이다. 끝으로 한글 서예를 어떻게 생각하나.
“서예는 누구나 읽고 그 뜻을 쉽게 알 수 있어야 생명력을 갖는다. 가독성이 중요하다는 이야기다. 요즘 한국에서 한문 서예가 설 자리를 잃어가는 것도 한자를 아는 사람이 점점 사라지고 있기 때문이다. 한글 서예가 그래서 중요하다. 한국 사람이면 누구나 읽고 이해할 수 있기 때문에 예술로서의 서예 본연의 생명을 얼마든지 이어갈 수 있다. 다만 쉽게 읽어지지 않는 난해한 한글 서예는 추상 작품처럼 예술적 표현으로는 괜찮겠지만 내용 전달이 목적이라면 문제가 있다.”
김진기 박사는 자신의 한글 외래어 표기법 개선 주장이 미국에 오래 살면서 생긴 ‘우리 것 지키기’의 작은 노력이라고 했다. 그와 같은 생각으로 지금의 비현실적인 ‘외래어 표기법’을 개선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꾸준히 있었다. 그 중에는 사라진 옛 한글 글자를 되살려야 한다는 주장도 있고, 김진기 박사처럼 새로운 표기 방식을 도입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하지만 주무 기관인 국립국어원은 요지부동이다. 새로 낯선 글자를 도입하면 국민이 알기 힘들고, 절실하지도 않은 이 문제로 굳이 혼란을 야기할 필요가 있느냐는 이유에서다.
시대는 변하고 있다. 한국의 위상도 달라졌고 한류 열풍에 힘입어 한글도 어떻게 더 뻗어 나갈지 모른다. 정말 세계 속의 한글이 되기를 바란다면, 또 그때를 준비하고자 한다면 지금이라도 국립국어원은 한국만이 아닌 해외의 다양한 개정 목소리에도 귀를 기울여야 한다. 우리말 우리글을 지독히 사랑한다는, 애틀랜타 사는 한 공학도의 목소리를 애써 전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종호 애틀랜타 중앙일보 대표
☞김진기씨는 : 서울대 전기공학과(80학번) 및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조지아텍에서 전기전산 공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유수의 미국 대기업 연구원으로 일하며 광통신 관련 신제품 개발에 앞장섰고, 세계 해저 광통신망 구축에 기여했다. 서예는 초등학교 때 입문했으며 일중 김충현, 여초 김응현, 심정 박주영 등 당대 한국 최고 서예가로부터 사사했다. 작품엔 무호(无号) 또는 참터라는 이름을 쓴다. 현재 미국 애틀랜타에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