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 있는 지인이 낯선 여자 사진을 한 장 보내왔다. 사진 속의 여자가 쓴 가발이 마음에 드는지 묻는 거였다. “제가 여기서 해드릴 거는 없고… 혹시 이 가발 어떠세요? 괜찮으시면 보내드릴까요? 힘이 되는 책도 한 권 보낼게요.” 다음 날, 이럴 때 아니면 언제 시원하게 밀어보겠냐며 가발은 사양했다. 하지만 멀리서 응원하는 그녀의 마음이 한겨울 따뜻하게 데워진 아랫목처럼 느껴져 힘이 났다.
밤새 내리던 비가 이른 아침 잠시 멈췄다. 집 앞을 한 바퀴 걷기 위해 나갔다. 먹구름은 아침 햇살을 삼키며 금방이라도 다시 비를 뿌릴 것 같은 기세로 바람을 몰고 있었다. 나뭇잎 흔들듯 제멋대로 내 머리를 매만지며 장난치는 짓궂은 바람이 반가웠다. 잠시 눈을 감았다. 얼굴을 스치는 이 기분 좋은 간지러움을 당분간은 느낄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머리를 쓸어 올리는 손가락 사이로 느껴지는 촉감이 새삼스럽게 소중했다.
첫 항암주사 맞고 나서 열흘 정도 지나 무심결에 쓸어 올린 손가락 사이에 머리카락이 한 움큼 엉켜 있었다. 배수구에 쌓여 있는 수북한 머리카락을 보고 있으니 두려움마저 들었다. 이미 들어 익히 알고 있었던 증상들이 하나씩 진행되고 있을 뿐 몰랐던 일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머리가 빠지지 않는 사람도 있다는 말에 희망을 걸고 있었던 건지 순간 울컥했다.
머릿속이 훤히 드러난 내 모습을 보고 있으니 언젠가 보았던 골룸 분장을 한 여자 코미디언이 떠올랐다. 우울한 마음에 작은 스카프로 두건을 접어서 썼다. 그나마 두건 밑으로 보이는 얼마 남지 않은 머리카락이 위로가 되는 건 무슨 마음인지 모르겠다. 어쩌면 여자에게 헤어 스타일은 여성미의 상징이며 이미지가 아닐까 싶다. 그동안 나에게 어울리는 헤어 스타일을 하기 위해서 공들였던 시간을 떠올려 봐도 알 수 있다.
다음날 미련 없이 남은 머리를 가위로 잘라내고 기계로 밀었다. 시원섭섭했다. 바라보던 남편은 두상이 예뻐서 그런지 멋있다는 말로 위로하며 내 표정을 살폈다. 나는 웃었지만 거울 속의 내 모습이 몹시도 낯설어 보였다. 가발을 쓰지 않겠다고 답을 했을 때는 굳은 심지처럼 마음이 확고했는데 막상 내 모습을 바라보니 자신이 없어졌다. 치료가 끝나도 6개월 정도는 지나야 회복되고, 그것도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라고 했다. 42.3%가 3년이 넘어도 치료 이전의 상태로 돌아오지 못한다는 신문기사는 절망스럽기도 했다. 몸의 통증은 밖으로 보이지 않지만 외모의 변화는 삶의 반경을 좁게 만든다. 거기까지 생각하지 못했었다.
어느 사이 가발을 검색하며 스타일은 어떤 지, 어떤 색이 맞을지를 고민하고 있었다. 사겠다는 마음으로 선택을 고민하는 것이 아니라 가발을 쓴 나를 상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내가 짧지 않은 시간을 인내하며 사람들의 시선도 덤덤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지에 대한 의문이 들었다. 무심결에 우편물을 가지러 문 밖을 나가다 가도 돌아와 모자를 쓰고 나갔다. 집 앞을 산책하러 가면서도 모자를 쓰기 위해 돌아온 일이 몇 번인지 모른다. 가발을 쓰거나 모자를 쓰는 일이 감추는 것이 아님에도 왠지 숨는 느낌이 들 때면 암울해졌다. 보여지는 것들이 중요한 것이 아님을 알면서도 불쑥 나타나는 감정들이 당황스러웠다.
아프다는 것은 죄를 지은 것도 아니고 숨길 일도 아니며 부끄러운 것도 아니다. 매일 지나가는 일상처럼 받아들이며 치료하면 되는 것이다. 항암치료가 약의 부작용으로 인한 고통과, 정신을 좀먹는 불안함까지 안겨주며 힘들게 하지만 이 또한 지나갈 거라는 것을 믿는다. 비록 몸은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지만 정신만큼은 병들게 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들었다.
언젠가 딸이 했던 민머리 스타일을 보며 그 자유로움을 부러워했었다. 멋지다고 딸에게 말해 준 것처럼 거울 속의 내게도 이야기했다. 젊음을 따라갈 수는 없지만 너만의 진국 같은 멋이 있다며 용기를 내라고 응원을 했다. 내 속의 밝은 기운이 멀리서 보내준 그녀의 사랑과 함께 피어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