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부(主婦)의 정의가 바뀌고 있다. 적어도 세계 금융의 중심지 미국 월가(街)에서는 그렇다. 여성이라고 으레 생각하기 마련이지만, 자발적으로 전업주부의 길을 택하는 남성도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22일 “월가의 파워 우먼 뒤엔 애정 듬뿍 전업주부 남편이 있다”고 보도했다.
특수한 소수의 이야기만은 아니다. 유의미한 통계로도 뒷받침된다. 퓨 리서치 센터가 지난해 낸 보고서에 따르면 이성(異性) 부부 중 45%가 부인의 소득이 남편보다 많거나 같다고 한다. 50년 전엔 15%만이 부부 중 부인의 소득이 높다고 응답했다고 WSJ은 전했다. 퓨 리서치 센터의 또 다른 보고서에 따르면 1989년엔 7%에 불과했던 남성 전업주부 비율이 2021년엔 18%로 11%포인트 올랐다.
뉴욕에 거주하는 맷 도너휴 씨는 일찌감치 2007년에 직장을 그만두고 주부라는 직업을 택했다. 조지타운대와 컬럼비아대와 같은 아이비리그 출신인 그는 증권맨이었다. 개발도상국 주식을 주로 매매하며 실적도 올렸지만, 세 자녀가 커가면서 문제가 생겼다. 아이들이 태어나면서 학업이며 집안일에 부부 중 한 명이 매진할 필요가 있다는 데 둘 다 동의했다. 이들의 선택은 남편이 회사를 그만두는 것. 부인은 남편이 가사를 전담한 덕에 사모펀드의 대표가 됐다. 부인이 10일간 해외 출장을 떠난 사이 도너휴 씨는 아이들의 하키 경기에서 응원을 하고 저녁 식사를 차려주고 장을 보고 숙제를 도와줬다.
미국 금융업계 여성 임원들의 전업주부 남편들이 주목 받고 있다. 사진의 주인공은 캐슬린 맥카시 볼드윈(왼쪽)과 그의 남편 맷(오른쪽). 캐슬린은 블랙스톤의 임원이다. 월스트리트저널 캡처
유명 사모펀드인 블랙스톤의 해외 부동산 부문 공동 대표인 캐슬린 맥카시 볼드윈 역시 전업주부 남편 덕에 마음껏 일에 매진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의 남편인 맷 볼드윈은 리서치 전문 기업의 최고재무담당자(CFO)였으나 2015년 일을 그만뒀다. 캐슬린은 WSJ에 “남편이 일을 그만뒀을 때 솔직히 우리 결혼생활에 안 좋은 영향이 있을까 두려웠다”며 “하지만 남편은 다행히 특별한 사람이라서 자신의 직업으로 스스로를 정의하지 않았고, 행복하다”고 말했다.
맷은 5시30분에 일어나 아침 식사를 차리는데, 1주일 중 하루는 쉰다고한다. 연어요리와 파스타가 주특기로, 가족 모두 그의 저녁 식사를 기다린다고 WSJ은 전했다. 캐슬린은 WSJ에 “업계에 요즘 많은 여성 임원들끼리 얘기를 해보면 남편이 전업주부인 경우가 꽤 된다”고 말했다.
행복한 케이스만 있진 않다. 폴 설리반은 2021년 뉴욕타임스(NYT) 칼럼니스트라는 명함을 버렸다. 그의 부인은 자산운용사를 경영한다. 설리반은 WSJ에 “전업주부 남편들은 친구들에게 ‘미스터 엄마’라고 놀림을 받거나, 밖에서 자기 직업을 잘 말하지 못하는 어려움을 겪는다”며 “이런 문제를 개선하고 싶어서 우리끼리 모임을 만들었다”고 말했다.
그들은 스스로를 “주인공 아빠”라고 부른다고 한다. 가족의 일을 제일 먼저 해결하고, 집안의 주인공이라는 의미에서다. WSJ에 따르면 이 모임의 회원들은 골드먼삭스와 JP모건 체이스 등 내로라하는 기업의 남편이라고 한다. 카멀라 해리스 민주당 대통령 후보의 남편인 더글러스 엠호프 역시, 가입했을 법한 모임이다. 엠호프는 변호사였으나 부인이 부통령이 되면서 일을 그만뒀다. 엠호프는 본지와 2022년 인터뷰에서 “부인이 일을 계속 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야말로 남자다운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사회 전체의 인식이 바뀌는 데는 시간이 더 필요하다. 수전과 맷 부부의 경우, 학교의 비상연락망에 아빠 전화번호를 1번으로 적어냈는데도, “어머니, 아이가 아픕니다”라는 전화가 걸려온다. 수전은 WSJ에 “그때 런던 출장 중이었다”며 “아버지에게 전화하시라고 부드럽게 말했고, 학교에서 5분 거리에 있던 맷이 바로 달려갔다”고 말했다.
한국중앙일보 전수진 기자 chun.sujin@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