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가 들어가는 것을 느끼며 살고 있다. 나이가 들면서 받아들이는 삶의 무게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의 답은 같을 것이다. 어떤 모습으로 살든 의미 있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어느 분이 ‘이제는 곱게 늙고 싶다’는 바람을 담은 글을 페이스북에 올렸다. 여기에 누군가 답글을 달았다. ‘부끄러움을 잃지 않을 것..’ 나이가 들수록 대체로 부끄러움을 잃어가는 것은 사실이지만, ‘우리가 가진 가치나 도덕의 기준마저 그 상실 속에 포함되서는 안된다는 말’일 것이다. 그 분의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미국의 작가 윈스턴 그룸의 원작을 영화화한 톰 행크스 주연의 ‘포레스트 검프’는 작품상 등 아카데미상 6개 부문을 수상한 감동적인 명화다. 이 작품이 다루고 있는 주인공인 포레스트 검프의 생애는 실로 순결의 덩어리 그 자체다. 얼핏 보면 그는 그의 이름과 말씨에서 느낄 수 있듯이, 어딘가 백치처럼 어눌해 보인다. 그러나 그가 이렇게 어수룩해 보이는 것은 바보이기 때문이 아니라, 부조리한 현실과 자신을 일치시키기를 거부하고 희생적인 인간정신과 사랑의 힘으로 그것에 반어적으로 도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극히 평범하고 어눌해 보이는 포레스트 검프가 영악하고 계산에 빠른 사람보다 진실된 삶을 성공적으로 살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순결을 유지하기 위해서 더러움과 폭력의 현장으로부터 죽을 힘을 다해 달아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에게 폭력을 행사하기 위해 자전거를 타고 뒤쫓아 오는 불량배들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온 힘을 다해 달리다가 버팀쇠가 다리에서 떨어져 나가는 것을 보았지만, 그 자신이 그것 없이 더 빨리 달릴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그들의 추적을 따돌렸다. 그는 항상 터무니없는 싸움으로부터 누구보다 빨리 도망쳐 달릴 수 있었기 때문에 승리자가 되었다. 그는 잘 달리고 피할 수 있었기 때문에 월남전에서도 많은 전우의 생명을 구하는 영웅이 되었다. 이러한 포레스트 검프가 우리에게 주는 가장 큰 감동은 그가 일생을 두고 사랑했던 불행한 지미에 대한 수줍음이다. 지미는 술주정뱅이 아버지의 학대 속에서 자라난 무서운 기억 때문에 끝없는 혼돈 속에서 자아를 상실하고 순결을 잃은 채 방황하지만, 검프는 그녀를 끝까지 사랑하면서도 성(性)에 대해 부끄러움을 느끼는 어눌한 모습을 보인다. 그의 부끄러움은 그로 하여금 지미의 육체를 끝까지 구하지 못했으나 그의 영혼을 구했다.
포레스트 검프의 부끄러움이 지니고 있는 이러한 도덕성에 우리의 마음이 크게 이끌리는 것은 부끄러움이 가장 인간적이기 때문이다. ‘부끄러움의 심리학’은 프로이트의 도식을 빌리지 않더라도 법의 힘에 앞서 인간사회의 균형을 지키는 가장 원형적인 안전판이다. 안타깝게도 우리 사회는 부끄러움을 잃어가고 있다. 언제부터인가 길 한 가운데에서 똥을 싸고도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는 인간들이 너무 많아졌다. 그 시대를 살아보지 않은 사람들은 쉽게 폄하하지만, 우리의 1970년대는 실로 대단한 시절이었다. 한편으로는 세계를 놀라게 한 경제성장이 있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독재와 장기 집권이 있었다. 빛과 어둠의 저변에서 사회를 지탱한 놀라운 힘은 공직에 있는 자들의 엄격한 명예규율(honor code)이었다. 꼭 높은 자리에 올라가지 않더라도 말직에 있는 자들도 공직자의 도리에서 벗어나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 규율은 본인뿐 아니라 가족에게도 똑같이 적용되었다. 공직자의 가족은 가정사를 희생하더라도 공직의 의무를 먼저 다하도록 배려했고, 공직자인 가족 구성원의 공적 업무의 영역에는 얼씬도 하지 않는 것을 철칙으로 삼았다. 멋모르고 공직자인 아비의 위세를 친구들에게 자랑한 초등학생 어린 자식을 그 어미가 울면서 종아리를 치는 일은 드물지 않았다. 스스로를 경계하는 것은 공직이 가진 명예의 원천이었다.
50년이 지난 지금 공적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이들의 자세는 초현실적이다. 대선 때부터 내내 문제가 되어왔던 배우자의 처신을 둘러싼 대통령의 태도는 한마디로 그 얘기는 꺼내지 말라는 것이다. 점점 문제가 커지다 못해 여당에서도 기소 의견이 나오고 보수 지지층의 여론도 크게 돌아서고 있는데 대통령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개인의 억울한 사정을 따지자고 들면 악질적으로 파놓은 함정에 걸려들었다고 항변할지 모르겠으나, 최고위 공직자와 그 가족은 개인의 억울함을 앞세울 수 있는 처지가 아니다.
대통령 일가가 명예규율을 따르지 않는 것을 맹비난하면서 이거야말로 탄핵감이라고 목청을 높이는 야당도 초현실적이기는 마찬가지이다. 본인이 매우 중대한 여러 건의 범죄혐의를 받고 있고 이 달에 그중 두 건에 대한 1심 선고를 앞두고 있는 제1야당 대표는 자신이 받는 혐의는 모두 검찰의 조작이지만 대통령 배우자는 특검을 해야 하고 “중간에라도 끌어내리는” 것이 대의민주주의라고 주장한다. 본인의 배우자가 경기도 법인카드를 비롯한 여러 불법적 특혜를 누렸다는 구체적 증언도 모르쇠와 버티기로 일관하면 그뿐이다.
이제 아무도 부끄러움을 따지지 않는 초현실적 세상을 목도하며 우리가 과연 지난 50년간 나아진 것이 있다고 말할 수 있는지 되돌아보게 된다.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하며 죽는 날까지 한 점 부끄러움 없기를 다짐한 시인의 순수함을 바라기엔 시대가 너무 탁해졌다.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부끄러움이란 우리의 근원을 향한 잊혀지지 않는 그리움’이라고 한 본 회퍼의 말의 의미가 더욱 간절해진다. 부끄러움을 모르는 영악하고 부패한 엘리트들보다 어눌하지만 인간애가 넘쳐 흐르며 부끄러움을 느낄 줄 아는 사람들이 잘 사는 사회가 우리가 바라고 꿈꾸는 사회이다. 이재명 관련 1심 선고가 다가오고 있다. 이번 판결은 ‘사법’과 ‘정치’의 싸움이다. 다시 말하면 ‘정의’와 ‘숫자’의 대결이다. 온 국민이 이 재판의 결말을 주목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