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 등산팀이 11월의 첫 월요일 공원 숲길을 걸을 때, 숲 속 길바닥에 쌓인 낙엽들이 발에 밟혔다. 사각사각 낙엽 밟히는 소리가 즐겁다. 쌓인 낙엽을 발길로 차니 낙엽이 흩어진다. 여자들은 여자들끼리 걸으며 끊이지 않고 떠들고, 가끔은 까르르 웃음소리가 들린다. 남자들도 삼삼오오 떼를 지어 걸으며 사는 이야기도 나누고, 단풍과 낙엽도 감상한다. 숲속을 걸으니 걸어서 건강에 좋고, 친구들과 떠들 수 있어서 좋고, 자연 속에서 자연의 변화를 보며 깨달음을 얻어서 좋다.
나는 남자들 일행의 뒤를 따라가다가 가을 숲을 보려고 혼자 다른 길로 들어섰다. 숲 속을 들여다보아도 여름에는 나무 잎들 때문에 보이지 않던 숲 속 땅바닥이 멀리까지 휑하니 잘 보인다. 크고 작은 나무 줄기가 보이고 땅 바닥은 낙엽들로 누렇게 덮였다.
훤히 들여다 보이는 숲 속에 쓰러져 누은 큰 나무가 보인다. ‘저 나무도 오래 살다가 늙어 저렇게 쓰러져서 누었는데, 일년만 살다가 죽어 떨어진 낙엽들이 이불을 덮어주듯 죽은 나무 주변에 쌓이는 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죽은 나무에 관심이 가니, 휑하니 땅들이 보이는 숲 속에는 어디에도 죽어서 쓰러진 나무들이 보인다. 죽은 나무들은 큰 것, 작은 것, 제 모습 그대로인 것, 오래되어 썩어서 몸체가 다 보이지 않고 땅에서 겨우 일부 남았고 이끼들이 초록색 패치로 덮여 있다.
빼곡하게 자라는 작은 소나무 숲을 지나다 보니, 총총한 가느다란 줄기들 사이에 죽어 쓰러진 나무는 손가락처럼 가늘다. 좀더 자란 솔밭을 지나며 들여다보니, 그 속엔 팔뚝만큼 자란 죽은 나무들이 보인다. 장성한 큰 소나무 밑에는 죽은 소나무가 없다.
빈 터에, 솔씨들이 바람에 날려 무수히 떨어졌다면, 콩나물 시루같이 싹이 자란다. 햇빛과 물 경쟁에서 많은 나무들이 죽어야 몇 나무가 살아난다. 큰 소나무 한 그루가 넓은 땅을 차지하려면 그늘에 있는 수많은 나무들이 죽어 자기의 몸을 썩혀 거름이 되어 살아있는 나무를 더 자라게 한다. 죽은 나무들은 죽어서도 불평하지 않고 죽은 몸을 산 나무의 거름이 되어 준다.
경쟁에서 져서 죽은 나무를 슬퍼하는 것은, 인간 경쟁세상에서 수없이 많이 상처받으며 살아온 나 자신의 오해가 아닐까? 경쟁에서 죽은 나무는 큰 나무와 하나가 되어 살아서도 죽어서도 큰 나무와 조율하며 큰 나무를 돕고, 큰 나무들이 숲을 이루어 많은 생물들이 공생하는 생태계를 유지한다.
길가에서 쓰러진 거목을 가까이 가보니 나무껍질이 벗겨진 부분에 수많은 구멍들이 보인다. 사람이 드릴로 뚫어 놓은 것 같은 정교한 구멍들을 뚫고 사는 동물들, 죽은 나무를 먹거리로도 사용하고 사는 집으로 사용하는 동물들이 수없이 많고, 이끼와 버섯 같은 식물도 있다.
길 옆에 굵은 참나무 등걸을 팔을 둘러 안아 본다. 손끝이 닫지 않은 큰 나무다. 나무는 덩치가 내 몸보다 몇 십 배 더 크다. 이 나무도 늙으면 죽겠지? 내가 먼저 죽을까, 이 나무가 먼저 죽을까? 이 나무는 죽으면 숲 속에서 썩어가면서 다른 생물을 돕고, 나무를 만들었던 원소들로 되돌아 갈 것이다.
식물이나 동물이나 몸을 구성하는 원소는 산소, 탄소, 수소, 질소가 대부분이고 그 외 소량의 무기질이다. 탄소동화 작용은 초록 나무 잎사귀 속의 엽록소가 공기 중 탄소와 물을 태양열에 의존하여 합성하는 과정이다. 땔감을 태우거나 동물이 탄수화물을 먹고 에너지를 얻는 과정은 탄소 동화작용의 정반대의 과정이다. 죽은 나무나 죽은 우리 몸이 타거나 썩으면 우리 몸을 구성했던 원소들은 흩어져 자연 속에 환원되고, 일부는 다른 생명체의 구성 원소가 될 것이다. 숲 속에 죽어 누워있는 나무들이 살아있는 생명들을 도우며 자연스럽고 평안하게 변하는데, 나는 나의 죽음을 두려워하고, 죽은 후를 걱정하는 것이 모순이 아닐까? 숲 속의 나무들은 죽고 새로 태어남을 자연스럽게 반복하며 풍성한 숲을 이룬다. 나 자신도 조상들이 탄생하고 죽는 계속되는 그 순환속에 한 매듭인데, 죽음을 끝으로, 공포로, 종말로 보고 느끼는 것은 나의 이해부족이 아닐까.
주위를 둘러보니 아직도 붉고, 노랗고, 갈색의 단풍들이 장엄하게 어우러졌다. 산들 바람에도 단풍잎이 우수수 떨어진다. 계절의 수레바퀴가 아름다운 시간을 돌고 있다. 지구의 축이 23.5도 삐뚤어지지 않았다면 그나마 우리가 사는 지역에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없었을 것이다. 나에게 주어진 삶을 감사하며, 죽음도 삶의 한 부분이기에 죽음까지도 자연스럽게 감사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