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는 외쳤다. ‘신은 죽었다.’ 니체는 종교가 추구하는 절대 선(善)이나 초월적 가치가 이미 붕괴되고, 사회를 제도하고 규율하는 역할과 기능을 상실했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신은 죽었다고 선언한 것이다. 그렇다면 낡은 신이 죽은 텅 빈 세계, 발 딛고 설 땅이 사라진 폐허에서 인간은 무엇을 해야 할까? 니체가 볼 때 인간은 새로운 신을 만드는 대신 ‘초인’으로 거듭나야 했다. 차라투스트라는 ‘초인’을 알리러 온 예언자였다. 그는 자기의 집을 파괴함으로써 스스로를 빈약한 존재라고 오해하던 인간들을 흔들어 깨웠다.
박정희는 1979년 10월29일 저녁 7시40분 김재규가 차지철을 쏠 때, 그리고 차지철이 실내 화장실로 달아날 때, 이어서 김재규가 일어서서 4∼5초쯤 주저하다가 박정희의 가슴을 향하여 발사할 때 미동도 하지 않고 눈을 지그시 감고 있었다. 차지철이 실내 화장실 문을 빼꼼이 열고 “각하 괜찮습니까”하고 물었을 때 박정희는 “난 괜찮아”라 고 했다. 두 여인이 ‘“각하 진짜 괜찮습니까”라고 했을 때 그는 또다시 ‘“난 괜찮아”라고 했다. 이 순간 그는 관통상으로 인해 등에서는 선혈을 콸콸 쏟고 있었다. 세계의 암살사를 다 뒤져도 이런 초인적인 장면을 발견하기란 어려울 것이다. 준비 없이 맞이한 상황에서 그가 보여준 이 의연한 모습이야말로 인간 박정희의 꾸밈없는 진면목이다.
이런 행동은 죽음과 오랫동안 대면해왔던 사람, 그리하여 죽음과 친구가 된 사람만이 보여줄 수 있는 것이리라. 그는 어머니가 임신했을 때 지워버리려고 그렇게 애썼던 생명이었다. 44세에 며느리를 둘이 나 둔 어머니는 박정희를 임신하자 간장을 두 사발이나 마시고 기절해보기도 하고 높은 데서 뛰어내려 상처를 내보기도 했다. 무거운 것을 배에 얹어서 뒤로 넘어져보기도 했으나 뱃속의 생명은 지워지지 않았다. 그리하여 ‘태어나서는 안될 생명’이 태어났고 이 인물에 의해 이 나라가 천지개벽의 변화를 겪었다.
박정희는 가난과 그에 따른 인간적 수모, 식민지 시대의 울분, 해방 후 사상 대결에서 겪었던 비참함을 하나의 거대한 응어리로 만들어 가슴 속 깊이 묻어두었던 사람이기도 하다. 이 응어리를 개인적 차원에서 해소하려 하지 않고 민족적 차원에서 풀어간 점에서 그가 혁명가임을 확인하게 된다. 이 응어리는 그의 동력원이었다. 박정희는 섬세하지만 담대한 사람이었다. 즉, 마음은 여리고 부끄럼을 탔지만 간은 큰 사람이었다. 육영수 여사와 선보러 갈 때는 가슴이 떨려서 소주 한 병을 마시고 간 사람이 총구 앞에서는 태산처럼 의연했다. 말년의 박정희는 아내를 잃은 허전함으로 해서 내면이 해이해졌다. 그를 둘러싼 권력의 갑옷은 차지철 경호실장의 월권에 의해서 경직되어갔다. 이 허전함과 경직됨의 틈바구니에서 김재규의 총탄을 허용했던 것이다.
1979년 11월 3일 국장이 거행되었다. 최규하 대통령 권한대행이 박정희의 영전에 건국훈장을 바칠 때 국립교향악단은 교향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연주했다. 독일의 리하르트 슈트라우스가 작곡한 이 장엄한 곡은 니체가 쓴 동명(同名)의 책 서문을 표현한 것이다. 니체는 이 책의 서문에서 ‘‘인간이란 실로 더러운 강물일 뿐이다’고 썼다. 그는 “그러한 인간이 스스로를 더럽히지 않고 이 강물을 삼켜 버리려면 모름지기 바다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덧붙였다.
박정희는 니체가 말하는 전형적인 초인이었다. 그는 니체의 초인에 대한 정의대로, 썩은 강물 같은 세상을 삼켜 바다 같은 새로운 세상을 빚어낸 사람이었다. 그는 시대정신을 반영하고 그 시대의 요구를 담아 현실 속에서 구현하는 사람이다. 영웅은 보통 난세에 나타나서 불꽃처럼 살다가 홀연히 사라진다. 그리하여 후세에 오래오래 계속되는 논쟁점을 남긴다. 바다처럼 청탁(淸濁)을 함께 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니체가 말한 대로 스스로의 혼을 더럽히지 않고 청탁을 함께 쓸어 담았다가 이를 소화하여 한반도라는 화폭에 큰 그림을 그렸다는 점에서 박정희는 김일성과 차원을 달리하는 인간이다.
오늘날 우리 국민들은 존경할 만한 지도자가 없음을 한탄하고 있다. 대한민국 정치는 비전도 없이 한 달만 지나면 무의미해질 정쟁으로 하루하루를 허송하고 있다. 역사에 무지한 아마추어 리더십과 감성적 포퓰리즘이 난무한다. 국민들이 정치지도자들을 더 걱정하는 이 난세에 박정희가 품었던 신념은 재조명할 가치가 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지도자는 솔선수범, 희생정신, 양심을 가져야 한다. 언행이 일치하고 국가와 국민에 대하여 누구보다 충실하여야 한다. 이와같이 할 때 국민은 마음속에서부터 지도자를 따를 것이다.”
지난 10월 29일은 박정희 대통령의 45주기였다. 45년 전 박정희는 김재규가 쏜 총탄을 맞고 세상을 떠났다. “서민 속에서 나고 자라고 일하고 그 서민의 인정 속에서 생이 끝나기를 염원한다”는 소망 대로였다. 그는 세계가 인정하는 비전의 지도자였다. 청렴했고 언행이 일치했다. 이재명 민주당 대표의 공직선거법 위반 사건에 대해 징역 1년형의 유죄선고가 내려졌다. 대법원에서 금고 이상형이나 100만원 이상의 벌금형이 확정되면 이 대표는 의원직을 상실하고 대선 출마도 불가능해진다. 사필귀정이다. 리더가 올바른 인격과 품성을 갖추지 못하면 신뢰를 받을 수 없다. 꼼수와 술수로는 결코 신뢰받는 참 지도자가 될 수 없다.
세상은 다시금 아수라장이다. 그리워 그리워 다시금 기억을 거머쥐려 해도 그 시절은 저 무저갱으로 꺼저버렸다. 따스한 해 뜨고 만물이 푸르르게 생동하던 그 시간은 다시 올 수 없는가.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을 부르다 간 이육사의 ‘광야’를 읊조려본다. ‘다시 천고의 뒤에/백마를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이 광야에서 목 놓아 부르게 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