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책으로 인생배우기 (35)
그림에도 온도가 있다면, 이 그림책의 온도는 섭씨 23도쯤 일 것이다. 옷에 들러붙은 추위가 삽시에 녹아버리는 온도, 벽난로에서 장작이 타닥타닥 타오르고, 빨간 체크무늬 담요가 펼쳐진 의자에 앉아 따뜻한 차 한 잔을 마시며 눈 내리는 창밖 풍경을 감상하기 좋은 온도. 그림책 〈Waiting〉은 찬 겨울 날씨를 오히려 포근하게 느끼도록 해주는 그림책이다. 미국의 대표적인 그림책 작가 중 한 사람인 케빈 헹크스는 이 작품으로 세 번째 칼데콧 상을 수상했다. 창밖으로 보이는 사계절의 아름다움과 삶의 기다림을 부드럽고 잔잔하게 표현하였다.
커다란 창문, 창틀 선반 위에 다섯 장난감 친구들이 있다. 친구들은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다. 점박이 올빼미는 달님을, 우산 쓴 꼬마 돼지는 비를, 연을 든 아기 곰은 바람을, 썰매 탄 강아지는 함박눈을 기다린다. 그리고 별 토끼는 특별히 무언가를 기다리지 않고, 그저 창밖을 보며 그냥 기다리는 것이 좋다. 창밖으로 기다리던 달이 떠오르고, 비가 내리고, 바람이 불고, 함박눈이 내리면 친구들은 행복하다. 창밖으로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오고, 계절 따라 꽃이 피고, 무지개가 나타나고, 천둥번개가 치고, 고드름이 열리고 하는 사이, 창틀 선반에는 가끔씩 누군가 떠났다가 돌아오고, 신기한 선물이 나타나기도 하고, 멀리서 찾아온 코끼리 아저씨가 깨져버려 다시는 볼 수 없게 되기도 한다.
그리고 어느 날 얼룩 고양이가 찾아와 친구가 된다. 놀랍게도 고양이는 하나가 아니었고, 몸 안에 네 마리 고양이를 품고 있었다. 이제 열이 된 친구들은 재밌고 행복한 일이 일어나길 다 함께 기다린다. 옹기종기 무언가를 기다리는 장난감들의 모습이 참 다정하다. 이들과 함께 창밖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기다림이 마냥 설레고 행복하게 느껴진다. 작가는 아이들에게 기다림은 지루하고 괴로운 일이 아니라, 기쁨과 즐거움을 주는 행복한 일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원하는 것을 바로 얻을 수 없기에 참고 견뎌야 하는 기다림은 아이들이나 어른, 모두에게 힘든 일이다.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고,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어야 한다. 그렇게 오랫동안 참고 견뎌야 비로소 한 송이 꽃을 피울 수 있다는 것이 기다림의 가르침이다. 장난감들이 가지고 놀아줄 손길을 기다리듯이.
삶은 기다림이다. 별 토끼처럼 특별히 기다리는 무언가가 없어도 계속 기다릴 수밖에 없는 것이 삶이다. 기다리던 일이 이미 이루어졌어도, 기다리는 일이 영원히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을 알아도, 인간은 기다림으로 살아간다.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기다리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도무지 없다. 봄을 불러와 소쩍새를 울게 할 수도 없고, 천둥을 불러 울게 할 수도 없다. 인간은 기다림 앞에 한없이 작고 나약한 존재이다. 지금 이 순간, 최선을 다하며 사는 어떤 이는 이런 주장을 할지도 모른다. 비행기나 우주선을 타고 다른 세계로 날아가 꽃을 피우면 된다고. 하지만 꽃을 피우겠다는 바람이 곧 기다림이다. 기다림이 없는 삶은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삶이다. 그것은 이미 삶이 아니다.
삶이 기다림이라면, 기다림의 자세가 곧 삶의 자세 일 것이다. 올바른 삶의 자세에 대한 대답은 수없이 많다. 기다림의 간절함이 클수록 불안하고 답답함도 크고, 때로는 결과에 대한 믿음을 잃고 절망하거나 포기하려 할 것이다. 더구나 한국인에게는 불치병이 있지 않은가? ‘빨리빨리’라는 병! 오늘도 삶의 굴레 속에서 기다림에 지쳤다면, 창가에 앉아 이런 시 한편 읽어보는 것은 어떨까?
진실로 진실로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내 나의 사랑을 한없이 잇닿은 그 기다림으로 바꾸어 버린 데 있었다. 밤이 들면서 골짜기엔 눈이 퍼붓기 시작했다. 내 사랑도 어디쯤에선 반드시 그칠 것을 믿는다. 다만 그때 내 기다림의 자세를 생각하는 것뿐이다. 그동안에 눈이 그치고 꽃이 피어나고 낙엽이 떨어지고 또 눈이 퍼붓고 할 것을 믿는다. 황동규 시인의 〈즐거운 편지〉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