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해 널 이 느낌 이대로 / 그려 왔던 헤매임의 끝 / 이 세상 속에서 반복되는 / 슬픔 이젠 안녕∼’
걸그룹 소녀시대가 2007년 발표한 데뷔곡 ‘다시 만난 세계’가 17년이 흐른 2024년 겨울 서울 도심 곳곳에서 울려 퍼지고 있다. 소녀시대 혹은 SM타운 콘서트가 아니라 최근 12·3 비상계엄 사태로 촉발된 촛불 집회 현장에서다.
‘다시 만난 세계’를 필두로 한 K팝 히트곡들이 집회 참가자들의 연령 폭 확대와 노래 자체의 힘에 힘입어 ‘2024년판 신 민중가요’로 부상하고 있다.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열린 윤석열 탄핵 시위대들이 응원봉을 들고 집회에 참석하고 있다.
12일 한국 대표 음원 플랫폼 멜론에 따르면 비상계엄이 선포된 지난 3일을 기점으로 일주일(12월 3∼9일)간 ‘다시 만난 세계’ 청취자 수는 직전 일주일(11월 26∼12월 2일)보다 23% 증가했다. 하루가 멀다고 신곡이 쏟아져 나오는 환경에서 캐럴 등 시즌송도 아닌 17년 전 아이돌 그룹 노래로는 이례적인 현상이다.
한 가요계 관계자는 “‘포에버 1′(FOREVER 1·2022년) 같이 소녀시대의 비교적 최근 노래도 있는데 데뷔곡이 갑자기 20% 이상 청취자 수가 느는 것은 외부적(계엄 사태) 영향이 있다고 봐야 한다”고 설명했다.
‘다시 만난 세계’가 집회 현장에서 불려 주목받은 것은 평생교육 단과대학 설립을 두고 총장 퇴진 요구가 제기된 지난 2016년 ‘이화여대 사태’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이화여대 학생들은 한목소리로 이 노래를 불러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등에서 화제를 모았고, 이러한 풍경은 8년 뒤인 2024년 촛불 집회에서 재현됐다.
소녀시대 ‘다시만난세계’ 뮤직비디오 댓글. 유튜브 캡처
김도헌 대중음악평론가는 “불안을 극복하며 미지의 세계로 도전하는 소녀들을 묘사한 가사가 ‘쉽지 않은 세상이지만 너와 함께 나아가겠다’는 메시지를 전한다”며 “멜로디도 힘 있게 쭉쭉 뻗어나가고, 노래의 마이너(단조) 코드도 다소 비장한 느낌이 들게 한다”고 분석했다.
이뿐 아니라 집회 현장에서는 에스파의 ‘위플래시'(Whiplash), 데이식스의 ‘한 페이지가 될 수 있게’와 ‘웰컴 투 더 쇼'(Welcome to the Show), 블랙핑크 로제의 ‘아파트'(APT.) 등의 히트곡도 종종 흘러나온다.
‘위플래시’나 ‘아파트’의 경우 가사가 주는 메시지 차원에서는 집회 자체와 별다른 접점이 없다는 점에서 관심을 끈다.
한 60대 집회 참가자는 “촛불을 들고 갔는데 주변 참가자들은 다 아이돌 응원봉을 들고 있어서 놀랐다”며 “내가 잘 모르는 요즘 노래들이 많이 나오던데, 앞으로는 최신곡도 공부해야겠다”고 말했다.
중장년층 사이에서는 ‘탄핵 플레이리스트’라며 이들 노래 외에도 (여자)아이들의 ‘클락션’, 샤이니의 ‘링딩동’, 슈퍼주니어의 ‘쏘리 쏘리’, 방탄소년단(BTS)의 ‘불타오르네’가 카카오톡 대화방 등을 통해 공유되기도 했다.
8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열린 윤석열 탄핵 및 구속을 촉구하는 촛불문화제에서 참가자들이 관련 손팻말과 응원봉을 들고 있다.
임희윤 대중음악평론가는 “1990년대 말∼2000년대 초중반을 지나면서 대학 총학생회도 탈(脫) 운동권이 되고 집회 문화나 참가자의 연령대가 바뀌면서 전통적인 민중가요나 투쟁가가 K팝으로 대체된 것 같다”며 “특히 이번 촛불 집회 참가자 가운데 20∼30대 여성의 비율이 높은데, 이들을 공감시키는 데에는 K팝만 한 것이 없다”고 설명했다.
전 세계를 사로잡은 K팝 특유의 신나는 비트와 분위기가 촛불 집회라는 의외의 장소와도 잘 어울린다는 분석도 나온다.
임 평론가는 “K팝의 자극적인 빠른 템포와 비트, 귀를 사로잡는 훅(Hook·강한 인상을 주는 후렴구)이 집회 열기를 끌어올려 현장의 동력을 공급해주는 측면이 있다”고 덧붙였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