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 안이 쓰다. 설탕도 쓰고 소금도 쓰다. 물을 마셔도 입안 가득 떨떠름한 맛이 느껴진다. 약의 부작용 때문인지, 내 미각이 달콤함을 기억하지 못한다. 단맛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은 삶의 큰 재미 하나를 잃어버리는 일이다. 먹는 것을 즐기지는 않았지만 소중한 행복 하나가 떠난 것만 같아 마음까지 허전하다.
책상 위에는 완성된 카드들과 아직 그리다 만 카드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다. 그동안 많은 사람들에게 받은 사랑을 조금이라도 돌려주고 싶은 마음에 하나하나 정성 들여 준비하고 있다. 오랜만에 만들어 보는 카드라 새롭기도 하고, 힘겨운 시간을 달래주는 위안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손은 입맛보다 먼저 둔해 져 있다. 글을 쓰는 것도, 그림을 그리는 것도 몸과 마음이 따로 노는 듯 예전 같지 않다. 하는 일들은 더디고 어설프기 짝이 없다. 답답함에 지치기도 한다.
문득 여고시절의 추억이 떠올랐다. 친구와 함께 연말카드를 만들던 기억이다. 친구의 오빠가 불우이웃 돕기 모금을 위해 카드를 그려 달라고 부탁을 했었다. 흔쾌히 응한 나는 친구와 함께 며칠 동안 열심히 카드를 그렸다. 검은 색지 위에 겨울 풍경을 그리며 흰 물감을 칫솔로 튀겨 눈 내린 효과를 냈던 기억이 지금도 선명하게 떠오른다. 카드 판매가 성공적이었고 고맙다는 인사를 들으며 느꼈던 뿌듯함이 지금도 마음에 남아 미소를 짓게 했다. 풋풋했던 그 시절을 떠올리며 나는 앨범을 꺼내 친구를 찾아보았다. 이렇게 다가온 추억들이 씁쓸함을 잠시 잊게 해 주는 묘약 같았다.
예전 같았으면 연말은 늘 분주했다. 잦은 연말 모임에 외식도 많았고 여행 다녔던 순간들도 스쳐 지나갔다. 한 해를 돌아보며 감사했던 사람들에게 안부를 전하며 한 해를 마무리했다. 특별한 것이 없어도 새해 계획을 세우며 나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이었다. 계절이 바뀔 때면 옷장을 정리하듯 주변을 정돈하는 의미 있는 시간이기도 했다. 하지만 올해는 모든 것이 다르다. 마지막 남은 달력을 보고 있으니 머릿속까지 씁쓸해진다. 이맘때 즐겼던 파티나 새해의 계획 같은 것이 지금은 현실과는 너무 동떨어진 사치스러운 감상처럼 느껴졌다.
나는 건강이 회복되기까지 얼마나 시간이 걸릴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희망과 절망 사이에서 줄다리기를 하고 있다. 암투병이라는 길고 낯선 터널을 지나며 어떤 날은 하루를 견디는 것조차 버거웠지만, 또 어떤 날은 작은 일에도 희망의 싹을 키웠다. 감사하다가도 나 자신이 스르르 무너질 때면 삶 자체가 먼지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내가 무엇을 해야 하고 어디로 나아가야 할지. 이 또한 지나가는 삶의 시간들일 뿐 멈춘 것이 아니라 흘러가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쓴맛이 가득한 시간 속에서도 나를 세워주는 것은 내 감각들이 여전히 살아 있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내 곁에 있다는 것이다. 오늘도 눈물 나게 아름다운 하늘이 내 두 눈을 가득 채우고 있다는 사실이다.
새해는 푸른 뱀띠 해라고 한다. 푸른 뱀이 상징하는 지혜와 신중함, 성장과 번영은 긍정적이고 희망적인 해석으로 내게 다가온다. 어려움을 극복하고 새로운 길을 찾는 해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마치 나를 위한 응원처럼 느껴 지기도 했다. 긍정적인 사람은 어려움 속에서도 기회를 발견하고 부정적인 사람은 기회 속에서도 어려움을 탐색한다고 처칠은 말했다. 긍정의 힘을 믿는다.
푸른 뱀이 가져올 새해의 희망처럼 나는 늘 그래왔듯이 앞으로 나아갈 것이다. 넘어야 할 고개는 여전히 남아 있지만, 그 끝에서 만나게 될 또 다른 빛을 나는 기대한다. 쓴맛이 사라진 뒤에 느끼게 될 단맛이 얼마나 달콤하고 소중할지 알고 있기 때문이다. 삶은 늘 그랬다. 고진감래라고 하지 않았던가. 나는 이 시간을 통해 누군가의 아픔을 더 깊이 공감하고, 더 넓은 마음으로 품어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다시 찾아올 단맛을 기대하며, 오늘도 나는 한 걸음 내딛는 발걸음에 힘을 담아 본다.
환한 햇살이 블라인드 사이로 스며들어 작업하는 손등 위에 따스한 줄무늬를 그린다. 온몸으로 퍼지는 온기가 오늘의 시작을 응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