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 반닫이에 들어가 누워 본 적이 있다. 나프탈렌 냄새가 콩닥콩닥 가슴을 두드렸다. 마당에서 숨바꼭질하다가 할머니 방에 숨어들어, 더 깊고 은밀한 곳으로 나를 이끄는 나비에게 홀려 들어간 곳, 할머니의 철 지난 한복이 고이고이 깔려 사각거리며 감싸주던 곳에서 살포시 잠든 적이 있다.
반닫이 선반 위에는 할머니가 손바닥으로 주름을 반듯이 펴서 개어둔 이불이 놓여있고, 그 아래 검은 쇠로 된 고리에는 청실홍실 매듭실이 넘늘거렸다. 고리를 당기면 날개를 접어 문을 열어주는 나비 네 마리. 할머니와 함께 오랜 세월 함께 늙어 가는 반닫이였지만 나비 모양 경첩은 언제라도 때가 오면 날개를 펴고 훨훨 날아오를 것처럼 반들거렸다.
옛날엔 딸이 태어나면 마당에 오동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딸이 자라서 시집갈 때 그 오동나무를 베어 반닫이를 만들어 혼수로 보내기 위해서 였단다. 반닫이는 장롱을 준비할 만큼 넉넉하지 못했던 우리 할머니들이 옷이나 그릇, 제기, 귀중품 등 여러 생활용품을 보관하던 가구이다. 솜씨가 좋은 집에서는 직접 만들기도 하였고, 주로 목수 장인에게 주문 제작하였다고 한다.
여기에 경첩을 커다란 나비나 꽃문양으로 만든 것은 아마도 가장 훼손되기 쉬운 부분을 견고하게 만들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무거운 물건을 넣어둬도 비틀어지지 않게 두꺼운 판재를 사용했으니, 문짝은 무거웠고 무거운 문짝을 붙잡아 줄 경첩은 넓게 힘을 분산하여 못을 여러 개 박아 달았던 것이다. 어릴 때, 안방을 지켰던 장롱이 언제 버려졌는지도 모르는 새에 버려진 데 비해, 입때껏 제기를 담아두는 용도로 쓰였던 할머니 반닫이만 봐도 얼마나 튼튼하게 만들어진 가구인지 알 수 있다.
요즈음, 사는 게 팍팍해서 그런지 쫓기는 꿈을 자주 꾼다. 꿈속에서 어디에서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모른 채 누군가에 쫓기고 있는 나는, 어둡고 좁은 공간을 찾아 몸을 구겨 넣는다. 하지만 금방 불안해져서 다시 더 작고 아늑한 장소를 찾아 헤매 다닌다. 그러다가 나비를 만나기도 한다. 나비는 그렇게 자유롭고 평화로워 보일 수가 없다. 하늘거리며 앞서가던 나비가 감실감실 사라질 때까지 나는 우두커니 서서 처음인 듯, 아니 아주 익숙한 듯 하염없이 나비를 바라본다.
꿈속에서 나비를 보는 것은 좋은 소식을 상징한다고 한다. ‘가까운 사람이 큰 기쁨을 누리게 되어 자신도 행복해질 수 있음을 의미’라고 네이버 포털 사이트가 알려준다. 나비를 보면서 나쁜 감정이 들지 않고 평안했으니, 나비를 만나기 위해 쫓기는 꿈도 나쁜 꿈은 아닌가 보다.
2025년 새해에 나비가 들려줄 좋은 소식에는 뭐가 있을까? 무엇보다 지금 병환 중에 있는 분의 빠른 회복을 기도한다. 그리고 ‘몽고메리 여성문학회’ 회원들의 건강과 건필을 바란다. 나의 글도 좀 더 깊고 넓어지기를… 글과 연애에 빠져 살기에 어울리지 않는 방향으로 세류는 흘러가지만 글은 여전히 내 삶의 중심이다. 좋은 글이 어떤 글인지 아직도 잘 모르지만, 어쩌면 앞으로도 영원히 답을 찾을 수 없을지도 모르지만, 답이 없으니 모든 것이 다 답이 된다.
할머니 반닫이를 생각하다가 나비 모양 경첩을 떠올리니, ‘글쓰기는 경첩이구나!’라는 깨달음이 정답 없는 괄호에 슬그머니 들어앉았다. 나지만 또 내가 아닌 내 속에 있는 다른 나를 만나게 하는 문을 열어 주기도 하고, 내가 나의 색깔과 모양을 만들어 갈 수 있도록 문을 닫아 주기도 하는 글쓰기!
가난하고 어두운 곳, 작지만 소중한 것들, 미처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함부로 버렸던 것들을 다시 돌아보고 찾아가도록 하는 문을 잡고 있는 글은 경첩이다. 반닫이에 앉은 나비 모양 경첩처럼, 문이 열고 닫힐 때마다 나의 존재가 더 깊고 넓어지기를, 그래서 작고 여린 것들을 더 사랑할 수 있기를 기도한다. 엎드려 공책에 글을 쓰는 어깨가 뻐근해 온다. 꿈속에서 날고 있는 나비를 만나러 갈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