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책으로 인생배우기 36.
경상도 사투리에 ‘폭닥하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을 처음 듣는 사람은, 많은 사람이 좁은 곳에 모여 수선스럽다는 뜻을 지닌 ‘복닥거리다’와 비슷한 말인가 할 것이다. 경상도 사람인 나 또한 이 말을 쓸 때면, 아이들이 좁은 방에 옹기종기 모여 노는 모습이 그려진다. 오래전, 작은설에 사촌들과 동그랗게 앉아 이불 아래로 발장난을 치던 방, 콤콤한 메주 냄새와 사람 냄새가 뒤엉키던 시골 할머니 집, 그 작은 방이 오래도록 포근하게, 폭딱하게 남아있기 때문이다.
폭닥한 것이 그리운 겨울 날, 읽기 좋은 그림책〈Little Witch Hazel〉에는 계절별로 4가지 이야기가 담겨있다. 각 계절과 어울리는 이야기로 봄에는 고아가 된 알, 여름에는 여유로운 날, 가을에는 유령 그루터기, 그리고 겨울에는 눈보라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이렇게 한 권의 그림책에 4가지 이야기를 담다 보니, 책 두께가 꽤 두껍다. 모든 이야기가 토끼만한 크기의 마녀, 헤이즐의 숲속 생활이라 독립된 이야기지만 서로 잘 연결되어 있다.
이끼 숲 마을, 나무 그루터기 집에 사는 헤이즐은 작은 마녀라고 소개되어 있지만 약초꾼에 가깝다. 숲에는 요정들과 마녀, 트롤, 그리고 두더지 자매, 생쥐 가족, 오티스라는 이름을 가진 부엉이 등, 상상력을 자극하는 많은 친구와 이웃이 함께 산다. 헤이즐은 성실하게 숲속 동물들을 도와주고, 돌봐주는 마음씨 좋은 시골 의사 같다. 겨울의 눈보라 이야기에는 딱딱한 도토리를 깨물다 치통을 앓는 다람쥐, 땅을 파다 손에 가시가 박힌 두더지, 그저 누군가 함께 있어주길 바라는 외로운 나무 요정, 목에 개구리가 걸린 까마귀, 지난주에 출산한 토끼 가족이 나온다. 헤이즐은 이 모두를 돌보느라 바빠서, 날씨가 변하는 것을 미처 알아차리지 못하고 숲에서 눈보라를 만난다. 하얀 눈 더미에 모든 길이 사라지고, 길을 잃은 헤이즐은 몹시 춥고 피곤하여 눈보라 속에서 스르르 잠이 든다. 그대로 있으면 얼어 죽을지도 모를 헤이즐을 하늘에서 거대한 황갈색 새가 내려와 구한다. 이 황갈색 새 이야기는 봄의 이야기와 연결된다.
이 그림책을 읽고 나면 마음이 따뜻해짐을 느낄 수 있다. 마녀나 요정… 아니, 약초꾼, 시골 의사인 헤이즐 같은 사람이 지금도 어느 숲속에 살고 있는 상상을 해본다. 작달막하고 통통한 몸매에 커다란 빨간 모자를 눌러쓰고 마을 사람들을 도와주러 바쁘게 돌아다니는 사람, 나도 언젠가 시골에서 만났던 것 같은, 그런 사람을 생각한다. 이런 생각만으로 마음이 폭닥하다. 아담한 나무 집에서 욕심 없이 오순도순 살아가고 있을 마을 사람들, 여름내 일이 없어 낮잠 자는 우편배달부, 내일로 미룰 수 없는 일은 없다고 믿으며 여유를 나누는 친구, 떡갈나무 아파트와 이끼 숲 방앗간… 이렇게 예쁘고 사랑스런 마을은 그림책 속에만 존재하는 것일까?
꼬리에 꼬리를 무는 동화 같은 나라를 상상하다가, 안데르센의 동화 ‘벌거숭이 임금님’에 가닿았다. 겉모습에 치중하는 허영심 가득한 임금이 사기꾼 재단사에 속아 착한 사람 눈에만 보인다는 옷을 입고 벌거숭이로 행진할 때, “임금님은 벌거벗었다!”하며 소리친 아이는……
임금이 뒤늦게라도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달았다면, 아이를 불러 칭찬하고 상을 내렸을 것이다. 하지만 임금이 끝끝내 깨닫지 못했다면, 아이는 물론이고 아이의 말에 함께 웃은 백성들까지 벌을 받았겠지. 오히려 사기꾼 재단사들이 나쁜 백성을 가려주었다고 상을 받았을 지도 모른다. 온 나라에 협잡꾼과 아부꾼만 득실거리고, 자기반성이라곤 없는 임금은 “옷이 보이지 않는다고 말하는 어리석은 백성은 더 없겠지. 그건 바로 나의 권위에 도전하는 거니까.”라고 했을지도.
“임금님은 벌거벗었다!” 하며 소리친 아이의 뒷이야기는 책에 따라 제각각 다르게 펼쳐진다. 가장 동화적인 상상이라면, 벌거숭이 임금의 나라에는 착한 백성만 살아서 웃음거리가 된 임금이 스스로 잘못을 깨치기를 도와주고, 임금은 자신의 잘못을 부끄러워하며 고쳐나가는 그림일 것이다. 잘못을 고치기보다 잘못을 감추기에만 급급한 임금이라면, 그는 아직도 벌거벗고 있는 것이다.
“임금님! 어서 옷을 입으세요. 날이 찹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