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 노인들이 모여 이야기하는 중에 선생님에게 매맞은 이야기가 나왔다.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 때까지 누구나 다 선생님에게 매를 맞은 기억들을 이야기했다. 그러나 지금은 한국 학교에서 체벌이 없어졌을 뿐 만 아니라, 교사가 잘못하면 학생들과 학부모들이 선생을 체벌하는 이야기들을 나누며 세상이 많이 변한 것을 이야기했다. 20세기를 넘어가면서 세계의 모든 학교에서 체벌이 없어졌다고 한다.
우리 노인들이 이야기할 때 어떤 분은 어떤 과목에서 시험 점수가 너무 낮아서 손등을 회초리로 많이 맞아서, 그것이 계기가 되어 분발하여 열심히 공부했고, 결과적으로 부족했던 학과목을 잘하게 되었다고 했다. 어떤 분은 어려서 한문을 배웠는데, 훈장 선생님의 매질 속에서 천자문을 6살에 다 외웠다고 한다. 그 후에 학교 다니면서 다 외웠던 천자문을 잊었고 그렇게 매맞으면서 배운 것이 효과가 없다고 한다.
우리 부부는 1960년대 서울에서 초등학교 교사를 얼마간 했다. 당연히 교실 칠판 받침대에는 늘 회초리가 있었다. 60년대 초중반엔 서울의 초등학교 교실은 ‘콩나물 시루’ 교실이라고 해서 한 반에 학생수가 100명 가까웠다. 공부하는 분위기를 잡기위해, 엄격한 규율이 필요했고, 규율을 어긴 어린 학생들에게 체벌은 말보다 잘못을 분명하게 알려주는 방법이었다.
‘Spare the rod spoiled the child'(매를 아끼면 아이가 망가진다)라는 말을 일부 교사들은 그 당시 선진 미국의 교육적인 격언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 알고 있었다는 것을 나중 에야 알았다. 그 말은 잠언 13장 24절에 나오는 말로 오래 전부터 전해오는 말이었고, 미국 교육에서 생긴 말이 아니었다.
내가 한국에서 초등학교 교사할 때는 잘못하는 학생들에게 체벌을 가했지만, 교대 교수를 할 때나 미국에 와서 교수할 때는 잘못하는 학생들에게 체벌을 가한 경험이 없다. 만약 내가 체벌을 가했다면 요즘 한국 선생님들이 학생들이나 학부모들에게 매를 맞듯이 나도 매를 맞으며 해고되었을 것이다. 교육심리학에서는 사랑의 매가 효과기 있기보다 적대감, 불안, 억압의 감정을 만들고 잘못에 대한 반복적인 매질은 역효과가 난다고 한다.
큰 아들이 고등학생이었을 때 아침 등교전에 제 동생과 다퉈 동생을 울게 만든 모습을 보고 내가 큰 아이의 빰을 때렸다. 큰 애가 정색을 하며 내게 말 했다. “대디, 나를 힘으로 때리면 내가 대디를 힘으로 이길 수 있어!” “야, 이놈아, 내가 네 아비야!”
그날은 하루 종일 아들의 말이 내 생각속에 맴돌았다. 나는 교육 심리학 점수도 많이 딸 정도로 공부도 했다. 교수 노릇도 오래 했다. 그런데도 나에게 나쁜 버릇이 있는 것도 모르는 이유가 뭘 까. 내가 생각한 답은 내가 매맞으면서 살아온 오래된 경험 때문인 것 같았다.
어려서는 애들하고 싸우거나 잘못하면 아버지의 매를 맞았다. 학교에서 친구와 싸우거나 잘못하면 선생님의 매를 맞았다. 특히 중학교 때 지리 선생님은 교과서를 한 학생씩 돌아가면서 서서 읽게 했는데, 더듬거리거나 잘 읽지 못하면 옆에 서 있던 선생님이 회초리로 머리통을 갈겼다. 군대 갔을 때 엎드려 뻗쳐서 엉덩이를 맞았고, 정강이를 군화발로 차이고, 완전무장차림으로 연병장을 돌았다. 매를 맞으며 자라고 살아온 경험들이 나도 모르게 말로 해도 충분히 이해할 아들에게 뺨을 때리게 한 자신을 돌아보았다.
한때 나는 스키너라는 심리학자의 ‘조건부 강화'(contingent reinforcement)에 매료되었던 적이 있다. 사람이나 동물의 버릇을 고치려면 잘못을 지적하고 벌을 주는 것이 아니라, 잘 할 때를 기다렸다가 칭찬하고 상을 주는 원리이다. 방을 잘 정돈했을 때, 동생과 잘 놀 때, 숙제를 다하고 놀 때, 잘하는 아이의 행동을 알아주고 애가 좋아하는 칭찬이나 상을 주는 방법이다. 그런 행동을 몇 번만 반복하면 버릇이 되어 알아주지 않고 상을 받지 않아도 계속된다. 개나 고양이들이 주인이 원하는 대로 신기한 행동을 하고, 새들이 음악에 맞추어 춤을 주는 행동들을 훈련할 때 그 방법을 쓴다. 고래도 칭찬하면 춤을 춘다.
이웃의 잘못을 지적하기보다 잘할 때, 조그만 진전이 있을 때를 찾아 칭찬하려면 세상을 보는 내 눈길을 고쳐야 한다. 바람직한 방향에 대해 알아야 하고, 이웃의 행동 중에 바람직한 방향으로 가는 과정을 찾아보는 연습을 해야 한다. 동물은 바람직한 행동을 할 때를 인내를 가지고 기다려야 한다. 아이들과는 바람직한 행동을 대화로 나눌 수가 있다.
내가 고칠 수 없는 나쁜 일들만 보고 불평하며 산다면 나의 삶은 불만의 지옥이 될 것 아닐까. 아름답고 바람직한 행동을 찾아보는 버릇이 생긴다면 내 삶도 아름답고 희망 적으로 변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