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에게 가장 무섭고 ,피하고 싶고, 말하기 꺼려지는 것, 바로 죽음이다. 하지만 사람이라면 누구나 피할 수 없고 반드시 겪게 되는 것 또한 죽음이다. 어차피 피할 수 없는 죽음이라면 좋은 죽음, 품위있는 죽음을 맞이하고 싶다는 것은 모든 사람들의 공통된 소망이다. 얼마 전 온라인에서 본 어느 분의 글이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주었다.
“얼마 전 서울시 무연고 사망자’를 위한 공영장례에 70대 노부부가 참여했다. 고인은 1950년생, 75년의 삶을 사셨고 가족들과는 20여년 전부터 연락하지 않고 지냈다. 고인의 부모는 오래전 돌아가셨다. 배우자와 자녀도 없었다. 법적으로 고인의 장례를 할 수 있는 사람은 형제·자매 뿐. 그런데 이들의 나이도 칠팔십대다. 게다가 서울이 아닌 부산 등 경남 지역에 살았다. 고령으로 몸이 아프고 거동도 불편한 이들은 시신을 서울시에 위임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동생인 70대 노부부는 고인의 마지막 가시는 길은 지켜봐야 한다는 마음에 서울시 공영장례에 참여했다. 서울 지리를 모르는 노부부는 혹시나 늦을까 하는 마음에 화장 전날 서울역에 도착해 인근에서 밤을 새웠다. 새벽 일찍 서울시립승화원에 도착해 장례식을 기다렸다. 노부부의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죽음은 스산하다. ‘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 옛날 로마에서는 원정에서 승리를 거두고 개선하는 장군이 시가행진을 할 때, 노예를 시켜 행렬 뒤에서 큰소리로 ‘메멘토 모리’를 외치게 했다고 한다. ‘당신도 죽는다는 것을 기억하라’는 말이다. ‘전쟁에서 승리했다고 우쭐대지 마라. 오늘은 개선장군이지만, 너도 언젠가는 죽는다. 그러니 겸손하게 행동하라’는 의미에서 이 말을 외치게 했다고 한다. 우리도 언젠가 죽게 된다는 것을 기억하게 된다면 삶은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지게 되리라. “곧 죽는다는 생각은 내가 인생의 결단을 내릴 때마다 가장 중요한 도구였다.” 스티브 잡스가 생전에 스탠포드대학 졸업식 연설에서 한 말이다.
우리는 삶을 살아가면서 세 가지 형태의 죽음을 만난다. 수시로 만나는 ‘타인의 죽음’, 깊은 슬픔에 빠지게 하는 ‘그대의 죽음’, 그리고 종국에는 나 자신이 만나야 하는 ‘자신의 죽음’이다. 나 또한 나의 죽음을 기억하고 간직할 이들을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새삼 생각해본다. 죽음이란 생물의 생명이 소실되어 어딘가로 사라지는 것이다. 원래 없던 내가 다시본래 자리로 되돌아가는 것, 그것이 죽음이다. 나는 사실 부재였다. 완전한 무(無)였다. 태어나기 이전 상태로 회귀하는 것, 그것이 죽음이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은 반드시 죽는다. 생은 유한한 시간을 살아간다는 조건 속에서 펼쳐진다.
한순간을 산다는 것이 생명체의 조건이다. 누구도 그 조건을 위반하거나 거스를 수 없다. 언젠가는 끝나지만, 그때가 언제인지는 누구도 모른다는 점이 삶의 아이러니이고 매력이다. 이 순간을 산다는 의식, 모든 것이 순식간에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쓸쓸한 심정이야말로 인간의 인간다움이 아닐까. 소멸과 애도, 상실과 슬픔이란 감정 그리고 모든 것이 종내 사라진다는 허무감이 인간을 인간이게 만든다. 기형도 시인의 ‘쓸쓸하고 장엄한 노래여’라는 시는 마땅히 사라져야 할 것들이 사라질 때 쥐어지는 아름다움을 읊조리고 있다.
“가라, 어느덧 황혼이다 /살아있음도 살아 있지 않음도 이제는 용서할 때 /구름이여, 지우다 만 어느 창백한 생애여 …곧 어둠 뒤편에선 스산한 바람이 불어올 것이다 /우리는 그리고 차가운 풀섶 위에 /맑은 눈물 몇 잎을 뿌리면서 낙하하리라.”
김영민 교수는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고 한다. 죽음이 늘 곁에 있음을 인지할 때 삶이 더 견고해지기 때문이다. 죽음은 죽은자와 무관하다. 그것은 오로지 산자의 몫이다. 장례식장에서 돌아오는 길은 언제나 쓸쓸하다. 인생의 허망함을 알고, 치열하게 산 삶이 그 얼마나 부질없는 짓인지 새삼 느까게 된다. 그러면서도 다음날 또 그 삶과 마주서면 어김없이 그 삶이 반복된다. 그것이 인생인 줄 알면서도 그 인생을 돌아보며 스스로 자위하고 그 가슴이 절절하도록 아파하게 되는 것이다.
도처에 널린 죽음을 볼 때마다 미래의 나를 본다. 억울한 죽음과 황망한 죽음과 병들고 외로운 죽음과 어린 죽음까지. 지금까지는 운 좋게 피했으나 결국 도달할 죽음. 모르는 죽음이라도, 익명의 죽음이라도 애도해야 하는 이유다. 믿기 힘든 죽음들이 매일 새로운 뉴스가 되어 날아든다. 압축된 몇 문장과 이미지 뒤에 숨겨진 고통을 헤아리려는 잠깐의 노력은 나의 미래를 향해 미리 던지는 애도이다.
우리 부부가 다니는 MDC사랑복지센터 는 지난 4월 1일로 창립 12주년을 맞았다. 별도 행사는 없었지만 마가렛 사장은 깜짝 발표를 통해 ‘장례복지대책’이라는 선물을 내놓았다. 수혜대상은 6개월 이상 출석한 회원으로서 사랑복지센터의 홈케어와 데이케어에 모두 가입한 자이다. 지원 규모는 화장 비용과시신 운구 비용 및 유골함이다. 이밖에도 카운티에 제출하는 사망 증명서의 대행 서비스를 지원해준다고 한다. 마가렛 사장의 발표는 노인들로부터 뜨거운 박수갈채를 받았다. 어찌 그렇지 않겠는가. 우리는 누구나 그 수혜자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요즘 노치원 분위기는 사기충천(?)이다. 활기가 넘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