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9 LA 폭동 30년 릴레이 인터뷰 1. 후버마켓 박진원 사장
이민 20년에 일군 첫 가게, 꿈 이룬지 7개월 만에 불타
재건축 기다려준 이웃들 “함께하는 삶 의미 깨달아”
고생 끝 행복 시작인 줄 알았다.
꿈에 그리던 건물주가 되어 ‘가게를 잘 일궈보리라’ 다짐한 지 고작 7개월이 된 그 날.
아직 연기도 식지 않아 흰 연기만 피어오르는 새카맣게 탄 건물은 처참했다. 군데군데 빨간 벽돌만 보였을 뿐 잿더미들과 엿가락처럼 휘어버린 철근들이 전부였다. 다리에 힘이 풀려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모든 게 다 무너졌다.
20년 만에 일군 첫 가게
사우스LA 중심지인 후버 스트리트와 101가에 있는 리커스토어 ‘후버마켓’은 박진원(78) 사장이 이민 생활 약 20년 만에 일군 첫 가게였다.
1970년 초에 초청으로 LA에 이민 온 박 사장은 40대 초반이었던 그 시절 형과 의기투합해 샌드위치 가게를 운영했지만 판매부진으로 8년 만에 문을 닫았다.
박 사장은 “큰 꿈을 안고 미국에 왔는데 막상 와보니 너무 힘들어 잔디밭에 주저앉아 눈물 흘린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고 회상했다.
1989년 집을 담보로 ‘후버마켓’을 매입했다. 장사는 잘됐지만 늘 위험한 상황 속 긴장을 안고 살았다. 아들, 딸은 가게에 발도 못 붙이게 했다.
박 사장은 “오픈 첫날에 가족들이 다 함께 있는데 강도가 들었다. 바닥에 총을 쏘며 위협했고 이 장면을 아이들이 다 봤다”며 “위험한 곳에서 일하는 나를 아이들이 절대 본받게 하고 싶지 않았다”고 말했다.
1991년 10월, 박 사장은 가족들이 만류했지만 이왕 장사를 하려면 제대로 하자는 일념에 가게를 담보로 덜컥 건물을 샀다. 이때까지만 해도 7개월 뒤에 무슨 일이닥칠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정신과 상담받으며 버티다
1992년 4월 29일 오전 10시. 아침부터 가게 분위기가 어수선했다. 들어오는 손님마다 폭동이니, 불이니 한 두 마디씩 꺼냈다.
오후 2시가 넘은 시각, 평소 친했던 손님들이 급히 들어오며 “큰일 났으니 문을 닫고 빨리 피하라”고 재촉했다. 결국 5시쯤 문을 닫고 집으로 와야 했다.
TV를 보는데 상황이 심상치 않았다. 밤 10시쯤 알람 회사로부터 ‘가게 문이 부서졌으니 가보라’는 한 통의 연락에 철렁 마음이 내려앉았다.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고 다음 날 오전 7시 가게로 달려왔을 때 마주한 것은 처참한 모습의 건물이었다.
박 사장은 “다리에 힘이 풀려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눈물 밖에 안 나더라”며 당시 심경을 전했다.
박 사장은 충격에 한동안 식사도 못 하고 잠도 이루지 못했다. 큰 바위가 가슴을 짓누르는 느낌이었다고 말했다.
박 사장은 “눈만 붙이면 악몽에 시달려 잠을 잘 수 없었다. 정신과 상담받으면서 하루하루를 버텼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폭동은 단순히 건물만 무너뜨린 것이 아니었다. 그의 오랜 꿈도 산산 조각이 났다.
박 사장은 “가족들도 모두 제정신이 아니었다. 지금도 서로 그때 일을 얘기하는 것이 힘들다”고 말을 잇지 못했다.
다시 일어나다
이대로 있을 순 없었다. 다시 정신을 차리고 가게를 살려야겠다고 생각했다. 다행히 건물을 매입하면서 보험을 잘 든 게 큰 역할을 했다.
박 사장은 “그 당시 한 달 보험료로 2700~3000달러를 냈으니 다들 미쳤다고 했다”며 “하지만 돌이켜보니 신의 한 수였다”고 말했다.
피해 금액을 계산해보니 30만 달러가 넘었다. 급한 대로 화재 보험료로 20만 달러를 받아서 은행 대출금부터 갚았다. 이후 연방정부가 폭동 피해자들에게 제공하던 스몰비즈니스 융자(SBA)를 받아 그 돈으로 건물을 다시 짓기로 했다.
운도 좋았다. 건물이 재건되고 나면 주류판매 라이선스 발급이 힘들다는 지인의 조언에 일단 라이선스부터 신청했다. 다행히 별 탈 없이 1년 뒤쯤인 1993년 4월에 주류판매 라이선스를 받을 수 있었다.
라이선스 신청 과정이 진행되는 동안 시 정부에 건축허가를 신청해 승인받은 뒤 건물 기반공사를 진행했다. 주류 라이선스를 받고 난 후 한 달 뒤쯤 건물이 완공됐다. 폭동 후 정확히 1년 1개월 만이었다.
“함께 걷는 삶 배워”
불에 탄 건물을 수습하는 그에게 단골과 이웃들이 다가왔다. 박 사장의 고객들은 80%가 흑인이었다.
그들은 “지난 석 달 동안 여기서 챙겨간 술을 잘 먹었다”고 웃으면서 말했다. 그들의 말은 모두 진심이었을 것이다. 폭동 전에도 가게에서 물건이 한두개씩 없어지는 건 일상이었기 때문이다.
“전소 피해는 만성이 됐다. 주머니에 있는 맥주 꺼내라고 하면 주먹으로 맞기 일쑤였다”는 박 사장은 “맞고 얼굴에 시퍼렇게 멍이라도 들면 동네 아주머니들이 동정해줬다. 그렇게 맞으면서 장사했다”고 말했다.
폭동으로 다 잃은 건 아니었다.
박 사장은 “1년 뒤에 가게 문을 다시 여니 주민들이 내 손을 잡고 ‘다시 가게를 열어줘서 고맙다’고 하더라. 주민들의 진심이 느껴졌다. 그때 잠시 불나길 잘했다는 생각도 들었다”고 했다.
폭동은 ‘그들’이 아닌 ‘그’를 바꾸어 놓았다고도 했다. 처음으로 지역 주민의회 모임에 나가기 시작했다. 간식을 돌리기도 했고 상을 당한 흑인 주민들에게 조의금도 보냈다.
가게 청결도 신경을 썼다. 매일 빗질로 하루를 시작했고 주위에 예쁜 꽃도 심었다. 한인들이 돈만 벌어 나간다는 인식을 깨고 싶었다.
박 사장의 진심을 가장 잘 알아차린 건 손님들이었다. 박 사장의 안부부터 묻고 친근하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폭동 후 10년 이 지나자 가게 인근에 범죄는 현전히 줄었다.
새로 지은 건물에 ‘후버 리커’를 다시 열고 25년간 운영하며 주민들의 소소한 일상을 챙기던 박 사장은 지난 2018년 가게를 팔고 은퇴했다.
“이전엔 ‘나 혼자만 잘살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폭동 이후 그게 아니란 걸 깨달았죠. 함께 어깨 맞춰 걷는 것, 어우러져 모두가 함께 사는 삶이 가치 있는 삶입니다.” 반겨주던 주민들의 얼굴이 떠올랐는지 인터뷰를 마친 박 사장의 얼굴엔 미소가 피어올랐다. 30년 전 폭동의 피해자는 그렇게 흑인 커뮤니티의 일원이 돼 있었다.
장수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