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아 대표적 국립유산지역
고즈넉한 숲길 호수길 독특
바위틈에 핀 야생화도 볼만
# 새소리 요란한 숲을 지났다. 물 향기 그윽한 호수도 돌았다. 그리고 마침내 4억년을 버텨온 바위를 밟았다. 잠실운동장보다 너른 바위 위를 걸었다. 훠이훠이 걸었다. 디캡카운티, 아라비아 마운틴이다.
그림 같은 마운틴레이크 건너편으로 아라비아마운틴 정상이 보인다.
한낮의 5월 햇살은 생각보다 뜨거웠다. 1시간 남짓 걸었는데도 드러난 목과 팔 맨살은 따끔거렸고 이마엔 소금 땀이 흘렀다. 열사의 땅까지는 아니어도 ‘아라비아’라는 이름값은 그런대로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의아했다. 조지아, 애틀랜타 근교에 뜬금없이 아라비아산이라니. 어떻게 이곳에 이런 이름이 붙었는지 정확한 연원은 도무지 알 길이 없다. 개척시대 초기 정착민들이, 혹은 한때 이곳에서 돌을 캐내던 채석장 인부들이 그렇게 불렀을 거라는 추측만 할 뿐이다. 척박한 풍경과 화씨 130도(섭씨 54도)까지 올라가는 한여름 열기가 아라비아 사막을 연상시켰으리라는 짐작만 할 뿐이다. 이럴 땐 청마 유치환(1908~1967)의 시 한 편이 제격이다.
“나의 지식이 독한 회의(懷疑)를 구(救)하지 못하고
내 또한 삶의 애증을 다 짐 지지 못하여
병든 나무처럼 생명이 부대낄 때
저 머나먼 아라비아의 사막으로 나는 가자
거기는 한 번 뜬 백일(白日)이 불사신같이 작열하고
일체가 모래 속에 사멸한 영겁(永劫)의 허적(虛寂)에
오직 알라의 신(神)만이
밤마다 고민하고 방황하는 열사(熱沙)의 끝
그 열렬한 고독 가운데
옷자락을 나부끼고 호올로 서면
운명처럼 반드시 ‘나’와 대면(對面)케 될지니
하여 ‘나’란 나의 생명이란
그 원시의 본연한 자태를 다시 배우지 못하거든
차라리 나는 어느 사구(砂丘)에 회한(悔恨) 없는 백골을 쪼이리라 ”
– 유치환 ‘생명의 서’ 전문
시인은 대단하다. 보통 사람은 보지 못하는 것, 듣지 못하는 소리, 표현하지 못하는 생각과 감정을 이렇게 풀어낸다. 원시 본연의 자태를 갈구하며, 회한 없는 백골이 될 때까지 ‘나’를 찾아 나서겠다는 시인의 결연한 의지에는 한참 못 미치지만, 그 마음 백 분의 일이나마 닮아보려 사막 아닌 같은 이름의 산을 걸었다. 지난 주말 찾아간 아라비아 마운틴이다.
# 아라비아 마운틴은 디캡카운티 남쪽 스톤크레스트(Stonecrest)라는 작은 도시에 있다. 애틀랜타 도심에선 15분이면 닿고 둘루스 한인타운에선 스톤마운틴보다 좀 더 멀어 40~50분쯤 걸린다.
아라비아 마운틴 네이처센터. 하이킹 출발점이다.
이름은 산이지만 막상 가보면 산이라기보다 야트막한 구릉이다. 가장 높은 지점이라 해 봐야 해발 955피트(291m)에 불과하다. 이런 지형을 지질학 용어로 ‘머나드낙(monadnock)’이라 한단다. 한자로 번역하면 잔구(殘丘)다. 남을 잔(殘), 언덕 구(丘), 글자 그대로 아직 침식되지 않고 도드라지게 남아 구릉이 된 곳이다.
거대한 암반도 세월은 못이기는 듯 이렇게 갈라지고 조금씩 떨어져나가고 있다.
스톤마운틴처럼 산 전체가 하나의 화강암 덩어리인데 4억 년 전에 형성되었다고 한다. 스톤마운틴은 주변 침식이 심해 바위가 불쑥 더 높이 솟아 보인다는 것이고 아라비아 마운틴은 주변 침식이 진행 중이라 암반 부분이 조금만 드러났다는 게 차이다.
인접 도시 리소니아(Lithonia)는 지금도 별명이 ‘화강암 도시(City of Granite)’다. 이 일대가 한때 채석장으로 유명했기 때문이다. 1880년대부터 100년 가까이 돌을 캐냈다. 채석장 흔적은 지금도 곳곳에 남아 있다. 이곳에서 나온 화강암은 애틀랜타를 비롯한 동남부 여러 도시의 보도블록으로 쓰였고 재질이 좋아 고급 건축자재로도 많이 이용됐다고 한다.
아라비아마운틴은 질 좋은 화강암 생산지였다. 돌을 떼어낸 장 흔적이 곳곳에 남아있다.
서두에 아라비아 사막까지 들먹이긴 했지만 막상 걸어보면 사막이니 열사의 땅이니 하는 것과는 솔직히 거리가 좀 있다. 이곳 역시 나무 많고 숲 깊은 조지아의 여느 하이킹 트레일과 별반 다르지는 않아서이다. 굳이 특별한 것을 찾자면 축구장 몇 배는 되어 보이는 거대한 암석 위를 걸어 본다는 것이랄까.
젊은 하이커들이 걸어가고 있다.
그럼에도 아라비아 마운틴이 주목받는 이유는 이곳이 국립유산지역(National Heritage Area)이기 때문이다. 4억년이나 된 특이한 지형, 개척시대 초기 정착민들의 자취, 100년이나 지속된 채석장 흔적 등이 보존해야 할 유산으로 인정받은 것이다.
국립유산지역이란 보존 가치가 있는 자연과 문화 유적, 역사적 의미를 간직한 장소 등을 연방 차원에서 지정, 보호하는 곳을 말한다. 국립공원과 다른 점은 연방정부가 소유하거나 강제하지 않고 개발 및 보존, 관광, 교육 프로젝트를 모두 로컬 정부나 지역 사회와 협의해 결정한다는 점이다.
아라비아마운틴은 조지아의 국립유산지역 세 곳 중 하나다.
현재 미국 전역에는 55개의 국립유산지역이 있다. 조지아에는 아라비아 마운틴 외에 2개가 더 있다. 어거스타에 있는 ‘어거스타 수로’(Augusta Canal)와 사바나 주변의 ‘굴라 지치 문화유산 회랑’(Gullah Geechee Cultural Heritage Corridor)이 그것이다.
어거스타 수로는 사바나강과 이어져 1800년대의 목화 등의 이동 통로로 이용됐다. ‘굴라 지치’는 미국 남동부 해안을 따라 발달한 특유의 흑인 노예문화를 지칭하는 말이다. 굴리 지치 회랑은 사바나를 중심으로 남쪽 플로리다 잭슨빌에서 위로 사우스캐롤라이나를 거쳐 노스캐롤라이나 윌밍턴까지 이어진다.
서아프리카에서 붙잡혀 온 흑인 노예들의 후예들을 굴라 지치 사람이라 부른다. 연방 정부가 이들이 지켜온 고유 언어와 풍습, 음식, 조각, 퀼트, 민화 등을 보존하기 위해 국립유산지역으로 지정한 것이다.
# 아라비아 마운틴의 중심은 데이빗슨-아라비아 마운틴 자연보호구역(Davidson-Arabia Mountain Nature Preserve)이다. 디캡카운티 관할인 이곳은 2200에이커 크기의 카운티 공원이다. 호수가 2개 있고 습지, 숲, 개울 등도 고루 갖추고 있다.
걷기 좋은 트레일도 많다. 국립유산지역 구석구석을 연결하는 아라비아 마운틴 패스(Arabia Mountain PATH)는 30마일이나 된다. 자전거 타기도 좋아 한인 자전거 동호인들도 많이 이용한다.
30마일에 이르는 아라비아 마운틴 패스(PATH)는 포장이 되어 있어 자전거 타기도 좋다.
일반 하이킹은 대개 공원 북쪽 네이처센터에서 시작한다. 센터 건물 뒤 패스 트레일을 따라 남쪽으로 조금 걷다 보면 삼거리가 나오는데 아라비아 마운틴으로 가려면 왼쪽 클론다이크 로드(Klondike Road) 찻길을 건너야 한다. 오른쪽은 아라비아 호수가 있는 마일 록 트레일(Mile Rock Trail)로 이어진다.
숲길도 지나고 풀밭도 지나간다.
등산로 나무에 “개 찾습니다” 전단이 붙어있다.
찻길 건너 0.5마일 보드워크를 따라가면 ‘와일드라이프 센터’가 나오는데 이곳이 아라비아 마운틴 등산 출발점이다. 정상까지 바로 올라가는 마운틴 톱 트레일(Mountaintop Trail : 0.5마일)도 있지만 숲으로 꺾어 들어 호수를 끼고 돌아가는 마운틴 뷰 트레일(Mountain View Trail : 1.8마일)이 더 인기다. 경치도 빼어나고 나무와 숲, 호수와 풀밭을 번갈아 지나기 때문에 단조롭지 않아서 좋다.
네이처 센터에서 와일드라이프센터를 연결하는 0.5마일 보드워크.
바위 지대에 이르면 따로 길이 없다. 아무 데나 밟고 올라가면 그게 곧 길이다. 그다지 가파르지 않아 빤히 보이는 정상까지는 단숨에 올라갈 수 있다.
아라비아 마운틴을 찾은 한 가족이 바윗길을 올라가고 있다.
바위는 드러난 부분만 축구장 서너 개는 될 만큼 넓고 크다. 걷다 보면 중간중간 물웅덩이도 만나고 야생화도 볼 수 있다. 바위 틈새로 힘겹게 뿌리 내리고 피워낸 꽃들이라 하나하나가 대단하고 대견하다. 제대로 감상하자면 잔뜩 허리 굽히고 눈높이 낮추는 수고는 아끼지 말아야 한다.
움푹 팬 바위 웅덩이 옆에 한가득 피어난 야생화.
바위틈에 피어난 노란 선인장 꽃
멀리 발 아래로 울창한 숲과 호수가 내려다보인다.
바위 마루에 올라서면 적당한 곳에 앉아 숨을 고르는 것도 좋다. 올라온 곳을 내려다보면 끝없이 펼쳐진 신록의 숲이 넘실대는 초록 바다처럼 장관이다. 앉은 김에 허리를 곧추세우고 잠시 눈을 감아보면 더 좋다.
이끼 낀 거대한 바위 마루 까마득히 사람이 보인다.
수억 년 세월을 침묵으로 버텨온 바위는 거대한 와불(臥佛)인 양 여전히 말이 없다. 그 무언의 소리에 귀 기울이다 보면 어느새 자신이 바위가 되는 기분을 느낄 수도 있다.
“아예 애련(愛憐)에 물들지 않고 /희로(喜怒)에 움직이지 않고 /비와 바람에 깎이는 대로…/꿈꾸어도 노래하지 않고 /두 쪽으로 깨뜨려져도 소리하지 않는…” 청마 유치환이 ‘바위’라는 시에서 갈구했던 그런 ‘바위’ 말이다.
아라바아 마운틴 정상 부근. 누군가 돌탑을 쌓아 놓았다.
바위에 생긴 물 웅덩이. 흰구름이 내려 앉았다.
# 메모 : 아라비아 마운틴을 가려면 I-20 고속도로 동쪽 방면 74번 출구에서 내리면 된다. 인접한 파놀라 마운틴 주립공원도 아라비아 마운틴 국립유산지역에 함께 속한다. ▶등산로 입구 네이처센터 주소 : 3787 Klondike Rd, Stonecrest, GA 30038
글·사진=이종호 애틀랜타중앙일보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