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 사망 미군 5만4000여명
베트남전서도 5만8000명 희생
“왜 전쟁을 못 멈추나” 비판도
#. 한국전쟁
한국전쟁은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기습 남침으로 시작되어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이 맺어지기까지 3년 1개월 2일 동안 벌어진 전쟁이다. 남한과 북한 외에 미군을 포함한 16개 연합국과 중공군이 얽혀 싸운 국제전이었다.
전쟁 발발 당시 미국 대통령은 트루먼이었다. 그는 북한의 남침을 민주주의에 대한 공산주의의 도전으로 받아들이고, 이를 단호히 저지해야 한다고 믿었다.
“한국은 미국에서 수천 마일 떨어진 작은 나라지만, 그곳에서 일어나는 일은 모든 미국인에게 중요합니다. 6월 25일 공산주의자들이 남침했습니다. 이는 유엔헌장 위반이고 평화를 침해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 도전에 정면으로 대응해야 합니다.”
1950년 7월 19일 트루먼 대통령은 이렇게 연설하고 참전을 결정했다.
미국은 한국전쟁 기간 동안 국방비를 4배 가까이 늘렸다. 군수물자 생산도 7배나 늘어났다. 전쟁 3년 동안 178만 명의 미군이 한반도 땅을 밟았다. 투하된 폭탄도 63만 5000톤에 이르렀다. 이는 태평양전쟁 당시 투하한 폭탄보다도 13만톤이나 많은 양이었다. 북한 지역은 멀쩡한 건물이 없을 정도로 초토화됐다.
미 국방부 발표에 따르면 한국 전쟁 3년 동안 한국에서 사망한 미군은 총 5만4260명이었다. 이중 전사자는 3만3643명이었고 나머지는 질병이나 사고 등에 의한 희생자였다. 부상자도 9만 명이 넘었다.
한국 국방부에 따르면 한국군 사망자는 13만 8000명, 북한군 사망자는 52만 명이었다. 중공군도 13만 6000명이나 죽었다. 민간인 사망자는 남북한 합쳐서 53만 명이 넘었다. 부상자까지 합치면 6.25로 인한 남북한 희생자는 모두 450만 명에 이른다. 이는 당시 남북한 전체 인구의 5분의 1에 이르는 숫자다.
이렇게 큰 희생을 치렀지만, 미국에서 한국전쟁은 곧잘 잊힌 전쟁으로 여겨져 왔다. 미국의 일반 역사 교양서들을 봐도 이상하리만치 한국전쟁에 대한 언급은 적다. 중고등학교의 두꺼운 역사 교재 역시 한국전쟁을 소개한 지면은 많아야 한두 페이지다.
한국전쟁 연구가 적었던 것도 아니다. 수많은 학자나 언론인들이 한국전쟁을 다각도로 파헤쳤고 소련의 붕괴와 함께 밀봉됐던 관련 문서들이 쏟아져 나오면서 기존 인식과는 전혀 다른 자료나 해석도 나오고 있다. 그럼에도 분명한 것은 한국전쟁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과 소련으로 양분된 자유 진영과공산 진영의 대리전이었다는 사실이다.
전쟁이 끝나고 이제 두 세대가 흘렀다. 6.25를 경험한 세대 또한 거의 사라져 가고 있다. 오는 2022년 7월 27일, 워싱턴DC에선 한국전 참전 미군 전몰용사 3만 6634명의 이름을 새긴 추모의 벽(Wall of Remembrance)이 제막된다. 이 벽에는 한국군 카투사 전몰용사 이름도 함께 새겨진다. 착공식에는 한국 대통령도 참석했다. 추모의 벽 건립은 더 이상 한국전쟁이 잊혀진 전쟁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한미 양국의 각성이다. 건립 비용 마련에는 한인들의 정성도 보태졌기에 더 의미가 크다. 한국전쟁은 이렇게 잊힌 전쟁에서 기억되는 전쟁으로 다시 자리매김하고 있다.
#. 베트남전쟁
워싱턴 DC의 베트남전 기념관엔 매년 2000만 명의 참배객이 방문한다. 그곳엔 베트남에서 전사한 5만8000명의 미군 이름이 새겨져 있다. 참배객들은 아무 상관도 없는 그 먼 아시아 국가에서 희생된 아버지, 삼촌, 형제, 아들의 이름을 어루만지며 꽃을 바친다.
베트남 전쟁의 뿌리는 복잡하다. 1946년 시작된 1차 베트남 전쟁은 프랑스의 식민 통치에 대한 베트남의 독립전쟁이었다. 그들은 1954년 프랑스를 몰아냈다. 이어 제네바 협정이 맺어졌다. 한반도가 그랬던 것처럼, 베트남도 남북으로 분할하되 2년 안에 선거를 통해 통일 국가를 세우게 한다는 내용이었다. 협정대로라면 독립전쟁을 승리로 이끈 북베트남(월맹)의 집권이 뻔히 예상되는 상황이었다.
미국이 가만있지 않았다. 미국은 남베트남(월남)에 경제 및 군사 지원을 시작했다. 동남아의 친소 공산화 도미노를 막는다는 명분이었다. 하지만 월남 정권이 극심한 부패와 폭정으로 너무 인기가 없었다는 게 문제였다. 그 틈새를 ‘베트콩’으로 불리는 월맹 세력이 파고들었다. 결국 미국은 북베트남을 폭격했다. 통킹만에서 미국 선박이 먼저 공격받았다는 것이 이유였다(훗날 통킹만 사건은 미국에 의해 조작, 날조된 것임이 밝혀졌다). 2차 베트남 전쟁의 시작이었다.
베트남은 미국엔 깊은 수렁이었다. 미국은 2차 대전 당시 유럽과 일본에 던진 것보다 2배나 많은 폭탄을 베트남 땅에 쏟아부었다. 네이팜탄, 각종 화학 고엽제 같은 비인도적 무기로 정글을 초토화했다. 한국도 미국 편에 서서 1964년부터 4차에 걸쳐 전투부대를 파병했다. 1973년 철수 완료 때까지 파병된 한국군은 32만 명에 달했다(이 중 5099명이 전사하고 1만 1232명이 부상했다).
미국의 최신 무기와 물량 지원에도 불구하고 월남은 재래식 무기로 맞서는 베트콩 게릴라들의 저항 의지를 꺾지 못했다. 미국 국내의 반전 목소리도 갈수록 커졌다. 젊은이들의 반전시위가 물결을 이루었다. 결국 1968년 월맹군의 음력 설 대공세로 사이공이 함락됐다. 승패는 사실상 결정됐다. 1973년 종전협정인 파리협정이 체결됐고 미군은 철수했다. 한국군도 철수했다. 2년 뒤인 1975년, 월남은 완전히 패망했고 베트남은 사회주의 월맹으로 통일됐다.
미국은 베트남을 너무 얕잡아봤다는 게 전후의 공통된 평가였다. 그들의 민족적 특성, 역사와 문화, 전통을 인지하지 못한 결과는 세계 최강국의 패전이라는 치욕으로 남았다. 명분 없는 전쟁, 베트남전은 미국의 굴욕이자 오점이었다.
#. 페르시안 걸프전쟁
1990년 8월 2일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침공, 점령했다. 이에 맞서 유엔 결의에 따라 미국·영국·프랑스 등 34개 다국적군 68만 명이 이라크를 공격했다. 당시 미국 대통령은 공화당 조지 부시였다. 다국적군의 주력은 43만의 병력을 파병한 미국이었다.
다국적군은 패트리엇 미사일, 스텔스 폭격기 등 최첨단무기와 압도적 화력으로 이라크군을 무력화시켰다. CNN은 당시 폭격 장면과 전투 상황을 실시간 TV로 생중계해 일약 세계적인 방송사로 떠올랐다. 전쟁은 42일간 계속됐다. 38일간은 집중 공습이었다. 지상군의 공격은 마지막 4일이었다. 결국 이라크가 점령했던 쿠웨이트는 해방됐고 이라크는 초토화됐다. 이라크 병사는 10만 명이 죽었다. 정확한 통계는 나오지 않았지만, 민간인 사망자도 적지 않았을 것이라는 보도가 이어졌다. 다국적군은 378명만 전사했다. 미군 희생자는 150명이었다.
#. 전쟁, 누군가는 남는 장사
미국은 압도적인 군사력으로 세계 패권을 유지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미국이 세계 최강의 나라가 된 것도 계속된 전쟁을 통해서였다. 지금도 많은 미국인은 미국의 일방적 군사주의를 지지한다. ‘미국이 상시 전쟁 국가가 된 이유다.
역사를 돌아보면 미국만큼 전쟁이 ‘체질화된’ 나라도 없었다. 미국은 전쟁을 통해 나라를 세웠고, 전쟁을 통해 영토를 넓혔으며, 전쟁을 통해 초강대국이 되었다. 1776년 독립 선언 이후 지금까지 240여 년 동안 공식적으로 전쟁을 치르지 않은 해는 채 30년이 안 된다. 5년 이상 연속으로 전쟁에 개입하지 않는 기간은 대공황 직후인 1935년부터 태평양 전쟁 직전인 1940년까지가 유일했다. ‘영구 전쟁국가’라는 말이 그냥 나온 게 아니다.
하지만 군사 대국 ‘패권국가’ 미국을 비판하는 연구도 적지 않다. 앤드루 바세비치의 ‘워싱턴 룰-미국은 왜 전쟁을 멈추지 못하는가’(박인규 옮김, 오월의 봄 펴냄)는 왜 미국이 영구 전쟁국가가 되었는지를 심도있게 파고든다. 미 육군사관학교 출신으로 23년간 장교로 복무했던 저자가 말하는 ‘워싱턴 룰’이란 미국인의 마음속에자리 잡은 세계 경찰국가로서의 사명감을 말한다.
바세비치는 이렇게 진단한다. “미국은 자신만이 세계를 이끌고 구원하며 해방하고 궁극적으로 변형시킬 임무와 특권을 갖는다는 믿음을 갖고 있다. 그런 신념은 미국이 개입하는 온갖 전쟁을 정당화한다. 하지만 수많은 희생과 대가를 치르면서도 결코 전쟁을 중단하지 않는 진짜 이유는 따로 있다. 전쟁이 누군가에게는 남는 장사이기 때문이다.”
바세비치는 그 누군가를 이렇게 적었다. “그들은 선출직 또는 임명직 고위 관리들이고 거대 방위산업체와 대기업들이며, 그들을 위한 로비스트, 군 장교, 여러 국가안보기구의 요원들, 언론인, 대학과 연관 기관의 정책 전문가들이다.”
이종호 애틀랜타중앙일보 대표
20세기 이후 미국의 주요 전쟁
– 1914~1918년 1차 세계대전
– 1917년 미국 1차 대전 참전
– 1927년 찰스 린드버그 대서양 횡단 비행 성공
– 1929년 대공황 시작
– 1933년 프랭클린 루스벨트 뉴딜정책
– 1939~1945년 2차 세계대전
– 1941년 일본 진주만 공습, 미국 2차 대전 참전
– 1945년 일본에 원폭 투하
– 1946~1989년 미-소 냉전
– 1950~1953년 한국전쟁
– 1964~1975년 베트남전쟁
– 1969년 아폴로 11호 인류 최초 달 착륙
– 1983년 그레나다 침공
– 1989년 파나마 침공
– 1990~1991년 걸프전쟁
– 2001년 9.11 테러
– 2003~2011년 이라크 전쟁
– 2001~2021년 아프가니스탄 전쟁
시민권 시험 예상문제 풀이
문. 1900년대에 미국이 치른 전쟁 중 한 가지만 말해 보라. (Name one war fought by the United States in the 1900s.)
답. 수많은 전쟁이 있었지만, 모범답안으로 제시된 것은 다음 5가지다. 세계 1차 대전(World War I), 세계 2차 대전(World War II), 한국전쟁(Korean War), 베트남 전쟁(Vietnam War), (페르시안)걸프 전쟁(Persian Gulf War).
문. 대통령이 되기 전 아이젠하워는 장군이었다. 그가 참전한 전쟁은?(Before he was President, Eisenhower was a general. What war was he in?)
답. 세계 2차 대전(World War II) 당시 연합군 최고사령관으로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1953년부터 1961년까지 34대 대통령을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