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4년 9월 어느 날, 프랑스 참모본부 정보국은 프랑스 주재 독일대사관의 우편함에서 훔쳐낸 한 장의 편지를 입수했다. 편지의 수취인은 독일 대사관 무관인 슈바르츠코펜이었고 발신인은 익명이며 내용물은 프랑스 육군 기밀문서 명세서였다. 간첩활동의 거점인 독일 대사관을 감시하고 배반자를 색출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던 참모본부는 유태인 알프레드 드레퓌스 대위를 범인으로 지목했다. 명세서의 필적은 드레퓌스의 것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체포되어 군사재판에 회부되었다. 드레퓌스는 1894년 12월 군사법정의 비밀재판에서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재판이 끝난 후 대다수의 프랑스인들이 드레퓌스의 이름조차 잊어버린 1896년 3월, 참모본부 정보국의 조르쥬 빠까르 중령은 또 다른 간첩사건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하나는 드레퓌스의 유죄를 입증할 만한 증거가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이고, 문제의 명세서의 필적이 보병 대대장인 에스떼라지 소령의 필적과 똑같다는 사실이었다. 그는 이 사실을 상관에게 보고하고 에스떼라지를 체포하고 드레퓌스에 대한 재판을 다시 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돌아온 것은 칭찬 대신 질책뿐이었다.
드레퓌스의 형인 마띠외는 필사적이었다. 에스떼라지와 교분이 있던 한 증권브로커가 형 마띠외를 찾아와 명세서의 필적이 에스떼라지의 것임을 알려주었다. 마띠외는 즉시 에스떼라지를 범인으로 고발했다. 그러나 군 당국은 조사를 시작하고서도 질질 끌기만 할 뿐 그를 구속하지 않았다. 신문지상에서는 불꽃 튀기는 논쟁과 가짜뉴스들이 활개치기 시작했다. 대다수의 신문들은 당국을 두둔했다. 이러한 편파보도 속에서도 최초로 드레퓌스가 결백하고 에스떼라지가 진범이라는 주장을 한 신문이 있었다. ‘피가로’지였다. 에스떼라지는 재판에 회부되었지만, 재판부는 만장일치로 그의 간첩죄 혐의에 무죄를 선고했다. 오히려 빠까르 중령이 변호사에게 군사기밀을 누설했다는 혐의로 체포하는 어처구니 없는 일이 벌어졌다.
프랑스 국민은 둘로 갈라졌다. 드레퓌스사건에 대한 재심 요구파와 재심 반대파가 그것이다. 그러나 아직 재심 요구파의 힘은 미약했다. 그러나 1897년 1월 절망의 분위기를 일거에 몰아내는 대폭풍우가 몰아닥쳤다. 1898년 1월 13일,‘로로르’지에 ‘나는 고발한다’라는 제하의 글이 실렸다. 자연주의 소설가 에밀 졸라가 ‘대통령에게 보내는 공개서한이었다. 이 공개서한은 엄청난 파문을 일으켰다. 그는 드레퓌스가 결백하고 에스떼라지가 진범인 이유를 구체적인 사실을 하나하나 들어가며 밝힌 다음, 드레퓌스를 범인으로 만들어 군부의 과실을 은폐하려 한 참모본부 무리들과 국방부의 장군들, 엉터리 증언을 한 필적감정 전문가, 드레퓌스에게 유죄를 선고한 첫 번째 군사재판 및 에스떼라지에게 무죄를 선고한 두 번째 군사재판을 무섭게 질타했다. 그는 이렇게 외쳤다.“저는 강력한 신념으로 거듭 말합니다. 진실이 행군하고 있으며, 아무도 그 길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을. 진실은 지하에 묻혀서도 자라납니다. 무서운 폭발력을 축적합니다. 이것이 폭발하는 날에는 세상의 모든 허위를 휩쓸어 버릴 것입니다. 저의 불타는 항의는 영혼의 외침입니다. 이 외침으로 인해 법정으로 끌려간다 해도 저는 기꺼이 감수할 것입니다.”
에밀 졸라는 군법회의를 중상모략했다는 죄로 기소됐다. 그리고 징역 1년을 선고받았다. 발작적인 반유태주의 물결에 위협을 느낀 졸라는 주위의 권유를 받아들여 영국으로 망명했다. 그런데 1898년 8월, 예기치 못한 사건이 일어나 사태를 한 걸음 더 나아가게 했다. 일찌기 빠까르 중령을 모함하기 위해 에스떼라지와 짜고 문서를 날조했던 참모본부의 앙리 중령이 진상이 발각될 위기에 몰리자 면도날로 목을 찔러 자살해버린 것이다. 그러자 ‘진범인 에스떼라지는 재빨리 영국으로 도망쳤다. 파리의 신문들은 일제히 참모본부를 비난하고 나섰다. 재심은 이제 불가피해졌다. 1899년 6월, 고등법원은 1894년 12월의 재판이 무효임을 선언하고 재심을 명령했다. 그러나 군사법정의 심판관들은 드레퓌스에게 금고 10년의 유죄판결을 내렸다.
전세계의 프랑스 대사관 앞에는 항의군중이 몰려들었고 이듬해 파리에서 열리는 세계박람회를 보이콧하자는 결의가 이루어졌다. 위기에 몰린 대통령은 1899년 9월, 드레퓌스를 특별사면시켰다. 1904년 3월, 드레퓌스는 재심을 청구했다. 그리고 1906년 7월, 최고재판소로부터 무죄 선고를 받아냈다. 진실은 결국 승리했다. 드레퓌스는 같은 해 7월, 사관학교 연병장에서 프랑스 육군 소령으로 복귀하는 의식을 치르고 레종도뇌르 훈장을 수여받았다. 그는 무개차에 올라타고 형 마띠외와 아들 피엘을 양옆에 세웠다. 그들이 연병장을 나섰을 때 자발적으로 모여든 20만 인파가 일제히 모자를 벗어들고 경의를 표했다. “프랑스군 만세!”, “진실 만세!”, “드레퓌스 만세!’
요즘 한국에서는 ‘해수부공무원 피살사건’이 또다시 뜨거운 이슈로 떠오르고 있다. 서해에서 북한군에 피살·소각된 해수부 공무원 이대준 씨의 유가족은 “당시 (문재인 정부) 누군가의 지시에 의해 월북 프레임을 만들려고 조작된 수사를 한 것”이라며 진상 규명과 처벌을 요구하고 나섰다. 이 씨가 자진 월북했다는 증거가 없는데도 문재인 정부가 남북 이벤트 악영향을 막기 위해 월북으로 몰고 갔다는 것이다. 감사원도 이 씨 피격 사건이 어떻게 보고·처리됐으며 누구에 의해 왜곡됐는지에 대한 감사에 착수했다. 국방부와 해양경찰청은‘자진 월북’이라던 수사 결과를 번복했다. 앞서 법원은 ‘북측의 실종자 발견 경위’ 등 정보를 공개하라며 유족의 손을 들어줬다. 문재인 정부 청와대가 이에 불복해 항소했으나 윤석열 정부 국가안보실이 취하했다. 과연 어느 것이 진실일까. 문 대통령은 이 씨 아들이 억울함을 호소했을 때 “직접 챙기겠다”더니 자료 공개를 계속 거부했다. 법원의 공개 결정에 항소하고 대통령 기록물로 지정해 15년간 공개를 막았다. 그들은 무엇이 두려워 숨길까. 문 대통령 측과 민주당은 “권력에 의한 음모론이자 사실관계 호도”라고 했다. 그렇다면 당시 자료를 모두 공개하면 된다. 우리는 진실을 알고 싶다. 해수부 공무원의 ‘자진월북’은 누구 의 판단일까?